한 달 유럽여행을 통틀어 루카와의 만남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나에게, 몇 년 뒤에는 잘 기억도 나지 않을 관광지는 이들보다 매력적이지 못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씩 관광지 도장 깨기 여행을 다니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세상에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곳’이나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 이후에 나는 여행의 기준을 새로 세웠다. 여행에서만큼은 나의 욕망을 제대로 알고 추구할 것. 그동안 남들이 하는 대로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학업, 진로, 생활 방식. 그 틈에서 어렵게 떠난 내 여행만큼은 ‘남들이 하는 대로’가 아닌 나만의 여행으로 지켜줘도 괜찮지 않을까. 한 번쯤은 용기를 내봐도 괜찮지 않을까.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된 용기를.
--- 「프롤로그」 중에서
나의 테마로 디자인된 여행은 이토록 소중한다. 매 순간 가장 작은 구석구석까지도 나의 애정과 노력이 깃들어 있기에. 삼국지를 좋아해 시골 마을 관우의 묘까지 흘러 들어간 중국 여행, 맥주를 좋아해 각지에서 어렵게 찾아간 10개의 맥주 공장, 육로 이동을 좋아해 바다가 가로막지 않는 한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한 결정, 현지인과의 만남을 좋아해 각 나라마다 무조건 최소한 한 번씩은 고집했던 카우치서핑. 내가 스스로 기획한 여행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나의 흥미, 나의 적성, 나의 성격, 나 자신에 대해.
--- 「무언가를 좋아하면 여행은 특별해진다」 중에서
너무 내 얘기만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민망할 정도였는데, 크리스티나는 내가 그들에 대해 궁금했던 만큼 나를 더 알고 싶어 했다. 몰도바에 보기 드문 한국인 여행자가 아닌, 나라는 사람 그 자체를. 내가 크리스티나에게 쏟아냈던 이야기는 가족이나 정말 친한 친구들한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내 진짜 속마음이었다. 여행에서 가끔 이런 순간을 만날 때가 잇다. 우연히 만난 낯선 동행 앞에서 가장 ‘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 딸로서, 학생으로서, 친구로서의 역할을 내려놓고 정말 나 자신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 그럴 때면 나는 이 대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처음 본 사람에게 속마음 털어놓기 중에서
이들은 마치 지구에서 동떨어진 채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사는 것 같았다.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풍경 속에 꾸린 그런 세계. 수도 토르스하운을 벗어나 다른 섬으로 넘어가면 평일 오후임에도 영업 중인 카페 하나 찾기가 어려운, 길거리에 몇 시간 동안 단 한 명도 지나가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단절된 세계. 이 세계에 초대받는 유일한 여행자의 기분을 만끽하며 작은 소망을 품어보았다. 이곳이 앞으로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 섬만은 영원히 신비로운 곳으로 남을 수 있도록.
---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중에서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생각이 많이 든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세계일주도 카우치서핑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여행한 지 14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길거리를 나설 때면 낯선 남자의 시선을 애써 피하고, 검증된 호스트를 찾아갈 때마다 혹시 모를 불안감에 의심하게 되는 것. 그런 불필요한 감정 노동도 덜 수 있지 않았을까. 여자로서 안전하게 여행하기 위해 써야 하는 에너지를 온전히 여행을 즐기고 누리는 데에만 쓰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큰 욕심인 건지.
--- 「캣콜링 수난기」 중에서
‘세계여행을 하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나요?“ 여행을 마치고 나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삶은 여전하다고. 여행은 현실을 아무것도 바꿔주지 않는다고. 그렇다.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에 429일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429일이란 시간은 내 삶의 태도를 바꿔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불가능하다고 그어놓았던 경계선을 지우자 내가 갇혀 있던 작은 세계는 끝없이 뻗어나갔다. 유럽에서,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서, 각국의 현지인 집에서 다양한 삶을 목격하며 깨달은 건 세상엔 내가 믿던 정답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