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0일 밀라노 엑스포 개최 중에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마테오 렌치(Matteo Renzi) 총리와 회담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2014년 3월의 크리미아 편입 선언 직후, G7(Group of Seven, 서방 선진 7개국 정상회담)에 의해 G8 회합에 참가하는 것이 정지된 것에 대해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받고, “G7과는 그 어떤 관계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푸틴은 “러시아는 G8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G7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그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조직이 아니라 이해(利害)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그룹에 불과하다”고 갈파했다. 또한 “더욱 넓은 틀의 G20(Group of 20, 주요 20개국)이 있다. 우리는 브릭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에 참가하고 있으며 유엔(UN) 및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물론 G7 국가들과의 관계는 발전시켜나아갈 계획이다”라고 계속 말했다. “G7의 건투를 빈다”라고 덧붙인 푸틴의 말은 G8을 향한 결별 선언이었다. --- p.16
대통령 제2기째인 2005년 4월의 연차 보고 연설에서 “소련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비극”이라고 지적한 바 있고, 5월에 독일 ZDF 방송국 등과의 회견에서 “소련의 붕괴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해방의 기회가 되었는데, 그것을 당신이 ‘비극’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랍다”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푸틴은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붕괴한 것이 (독일인인) 당신에게 놀랍다는 것은 이상한 말이다. …… 자신을 줄곧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해왔던 사람들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러시아의 영역 바깥에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고 친족과 경제적 연계 등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되어버렸다. 그러한 사람들이 2500만 명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비극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박했던 적이 있다. 푸틴의 역사관에서는 소련의 국력이 약해짐으로써 동독과 서독의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한편 소련의 15개 공화국에 분산되어 거주했던 러시아인은 소련 붕괴에 의해 분단되고 지금도 그 민족 분단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 pp.64~65
푸틴은 크리미아 편입을 선언했던 연설 중에서 편입에 이해를 구하는 한편, 전례가 없을 정도로 격렬한 구미 비판을 전개했다. ‘독립신문’이라는 의미의 러시아 고급 일간지 『네자비시마야 가제타(Nezavisimaya Gazeta)』는 이튿날 1면 톱에 “푸틴의 풀턴(Fulton) 연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영국 총리를 역임한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 3월에 방문지인 미국 미주리(Missouri) 주의 풀턴에서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며 ‘철의 장막’이 내려지고 있다”고 소련을 비난하여 동서 냉전 시대의 시작을 알렸던 것으로 여겨지는 연설에 비유되었다. --- p.67
우크라이나의 독립 움직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1991년 8월 소련공산당 보수파가 소련 대통령이자 당 서기장인 고르바초프를 휴가 중인 크리미아 포로스의 별장에 연금시킨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페레스트로이카로 혼란에 빠진 소련을 재생시키고자, 고르바초프가 추구했던 ‘신(新)연방 조약’ 체결을 저지하기 위해, 겐나디 아나예프(Gennady Yanayev) 부통령 등 소련공산당 보수파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Committee on the State of Emergency: SCSE)’의 설치를 선언하고 고르바초프는 “병이 났다”고 발표하며 권력 탈취를 도모했다. --- p.108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비아워비에자 합의’는 소련 해체에 의해 대통령 고르바초프를 배제하고자 하는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 옐친과, 우크라이나 민족의 비원인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는 크라프추크, 그리고 에너지 등의 경제 문제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슈시케비치 간에 이루어진 합의였다. 그 이후 슈시케비치는 “최초에는 소련을 해체할 생각 등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비아워비에자에서 3명이 대화를 하는 가운데 소련은 이미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소련은 8월의 쿠데타 미수 사건 당시에 없어졌던 것이다”라고 변명을 하는 듯한 회상을 하고 있다. 적극적이었던 이는 고르바초프와의 권력 투쟁에서 최종 결말을 내고자 했던 옐친과, 대통령 선출과 동시에 행해진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독립’ 찬성에 직면하여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된 크라프추크 두 사람이었다. --- p.111
상임이사국 간의 대립으로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유엔 안보리를 대신하여 근년 들어 G8이 세계의 중요 과제에 대해 토론하는 장이 되었는데, 크리미아 편입 이후의 러시아 배제로 G8의 틀은 무너졌다. 다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중국, 인도, 러시아 등의 경제 발전에 의해 선진국 간의 대화만으로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G8 서미트에서는 일종의 아웃리치(outreach) 회합으로서 중국과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국의 정상을 초대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 p.141
푸틴은 미국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무력 행사, 경제적 수단과 프로파간다에 의한 압력, 내정 간섭이 행해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최근에는 세계 지도자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이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도 명백하다. 이른바 ‘빅 브라더(Big Brother)’가 자신에게 가장 친밀한 동맹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를 감시하기 위해 수십 억 달러나 되는 돈을 사용하고 있다. …… 우리 모두가 그러한 세계에서 생활하는 것이 쾌적하고 안전한 것일까? 그러한 세계가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일까? 미국이 세계의 모든 일에 간섭함으로써 안녕과 평온, 진보와 번영, 민주주의를 가져오고 우리는 다만 긴장을 풀고 쉬면 좋은 것일까? 그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라고 단언했다. 세계 주요국의 지도자 중에서 이처럼 노골적인 미국 비판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인물은 푸틴 외에 달리 없다. --- pp.144~145
키신저는 2014년 11월 13일 자의 독일 잡지 『슈피겔』 온라인판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크리미아는 특별한 사례다. 우크라이나는 장기간 러시아의 일부였다. 그 어떤 국가가 국경을 변경하고 타국의 일부를 취하는 것도 용인할 수 없지만, 만약 구미가 성실하다면 자신 측의 과오를 인정해야 한다. 크리미아 병합은 세계 제패를 향한 움직임은 아니었고,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도 아니었다”고 논하며, “구미는 우크라이나가 EU와의 경제 관계 강화 교섭을 개시한 것과 키예프에서 벌인 시위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러한 것은 러시아와 대화해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항상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은 잘못이었다”라고 지적하면서, 우크라이나 위기에는 구미 측에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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