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상이 실재를 초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생 인류는 가상이 실재를 압도하는 ‘가상화 혁명’을 목격하는 첫 번째 세대다. 가상화 혁명은 가상기술을 통해 가상이 실재를 초월하고 궁극적으로 실재를 변형시키는 현상이다. 가상기술이란 가상현실 기술이 아니다. 가상기술은 실재를 변형시키고 증강시키는 모든 종류의 초실재기술을 뜻한다. 오늘날 가장 근본적인 기술인 소셜미디어, 인공지능, 암호화폐는 모두 가상기술이다. 소셜미디어는 ‘현실’을, 인공지능은 ‘지능’을, 암호화폐는 ‘돈’을 가상화한다. 가상기술로 인해 탄생한 가상의 현실, 가상의 지능, 가상의 돈은 실재 위에 덧입혀져 실재를 가상의 질서로 재구축한다. --- p.8
페이스북, 알파고, 비트코인은 가상기술의 산물이다. 페이스북은 단지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아니다. 페이스북은 현실과 겹쳐 있으면서 동시에 그를 교란하는 가상현실이다. 알파고 역시 단순한 바둑 알고리즘이 아니다. 알파고는 인간 지능을 초월하는 지능을 예고하는 가상의 뇌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화폐에 그치지 않는다. 비트코인은 국가의 통제로부터 돈을 분리하고, 실재의 가치 체계를 무너뜨리는 가상의 돈이다. 모든 혁명적인 기술은 언제나 기술을 넘어선 변화를 만들어냈다. --- p.9
컴퓨터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들은 클라우드 서버로 옮겨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 시대 가장 거대한 전환이다. 우리 일상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는 구글,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도 모두 자사의 제품과 서비스를 클라우드 서버로 제공한다. 지메일이나 애플 뮤직을 사용할 때 우리는 이미 그들의 클라우드를 거친 서비스를 쓴다. 아마존에서 물건을 고를 때나 페이스북에서 친구의 소식을 볼 때도 우리는 그들의 클라우드에 기록된 자료들을 열람하는 것이다. 이 거대한 전환은 단지 컴퓨터 안쪽 세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컴퓨터 밖 현실세계, 즉 우리의 자아, 사회적 관계, 정치적 담론과 같은 실재의 대상까지 가상화되어 클라우드 서버로 옮겨지고 있다. --- pp.20~21
아마존 고를 단순히 ‘무인화’ 또는 ‘자동화’로 받아들이는 것은 좁은 해석이다. 아마존 고는 그보다 더 큰 함의를 지닌다. 아마존 고는 인간 노동을 자동화했다기보다는, 인간 노동이 개입될 여지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계산대에 인간 대신 기계를 앉힌 것이 아니다. 계산대에 의존하는 쇼핑 프로세스 자체를 없애버렸다. 물건을 집어든 순간(장바구니 담기)과 매장을 나가는 순간(결제하기)이라는 온라인 쇼핑의 방식을 오프라인 매장에 그대로 구현했다. 이는 온라인의 방식이 오프라인의 방식을 완전히 대체한, 실재의 ‘가상화’다. --- p.38
마치 사람들의 검색 행위가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 개선에 자동적으로 기여하는 것처럼, 우버 기사는 매번 승객을 원하는 장소에 데려다줄 때마다 자동적으로 우버 알고리즘 개선에 기여한다. 특정 지역의 통행량, 배차 상황, 운행 요청을 최적화하는 우버의 알고리즘은 우버 기사들로부터 전달되는 반복적이고 집단적인 주행 데이터를 통해 지속적으로 강화되며, 강화된 알고리즘은 우버 기사에게 다시 더 나은 주행 명령을 내리는 데 사용된다. 우버는 차량 호출 서비스임과 동시에, 전 세계 우버 기사를 통해 주행 데이터를 크라우드 소싱하는 기업인 것이다. --- pp.43~44
삶을 공유하기 위해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업로드한다는 것은 큰 착각이다. 오히려 우리는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업로드하기 위해 삶을 기획하고 콘텐츠를 생산한다. 소셜미디어가 활성화 상태를 유지할 있도록 우리는 삶에서 끊임없이 이벤트와 데이터를 만들어야 한다. 가상 자아를 먹여살리기Feeding 위해 우리는 업로드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 우리가 가상 자아에 대해 가지는 통제력보다, 가상 자아가 우리에게 가지는 통제력이 더욱 크다. --- pp.52~53
소셜미디어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전 세계인의 평점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하나의 거대한 엑셀 파일과 같다. 그리고 이 파일은 현대인의 가치판단 기준이 되는 데이터베이스 역할을 한다. 소셜미디어에 나온 ‘좋아요’ 숫자가 그 대상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다. 개인의 영향력, 제품의 선호도, 정당의 지지도 등 과거엔 정확히 정량화하기 어려웠던 데이터들이 모두 숫자로 표기되며, 우리는 숫자에 근거해 모든 것의 중요도를 파악하게 된다. 암묵적으로 우리는 ‘좋아요’ 숫자가 크면 사회적 권위가 있다고 받아들인다. 반면 ‘좋아요’ 숫자가 적거나, 또는 ‘좋아요’보다 ‘싫어요’ 비율이 높으면 사회적 승인을 얻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 p.91
확실한 것은 변화를 원하는 대중이든, 효율을 원하는 관료이든 인간 사회의 집단적 의사결정에서도 기계의 “더 나은 판단”이 적용되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대안으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인이 기계로 대체된다는 주장이 너무 과격하게 들린다면 좀 더 스케일을 줄여 볼 수 있다. 가령 도시 정책을 운영하는 일에서 기계가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실제로 도시의 교통을 최적화하는 일부터 실업 급여를 지급하는 일, 각기 다른 대상자에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사례는 전 세계 도시에서 늘고 있다. --- p.213
인공지능에 대해 사람들은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강인공지능을 과대평가하고 동시에 약인공지능을 과소평가한다. 약인공지능 앞에 붙은 약이라는 글자가 오히려 잘못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의 파괴력을 과소평가하는 잘못된 명명이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미래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맥락에서 약인공지능이라고 과소평가될 이유가 없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그 자체로 파괴적이며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대단히 걱정하는 한편,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걱정하고 있지 않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이 일상에 개입하며 인공지능을 활용한 감시 시스템의 등장, 알고리즘의 마인드 해킹(정치적 편향부터 감정 조작까지), 현실과 구분이 불가능한 가짜의 생성 등 이미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는 중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 도래한 문제들이다. --- p.223
비트코인의 가치는 자유로운 가치 교환을 원하는 미래 시민들을 통해 증명될 것이다. 특히 집단주의 정체성에 기반한 윤리와 다양한 컬트 집단의 자체 기준에 따른 도덕적 검열이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개인의 일상을 촘촘히 옥죌수록, 개인은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통한 자유로운 거래를 필연적으로 선호하게 될 것이다. 비트코인은 도덕이 아닌 자유의 편이고, 집단이 아닌 개인의 편이다. 비트코인은 더 도덕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존의 도덕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기술이다. 가상에서 구축된 자유로운 P2P 거래 질서는 결과적으로 실재의 윤리를 우회하고, 종국에는 붕괴시킬 수도 있다. 비트코인은 결제뿐만 아니라 윤리의 P2P화를 이끌 것이다.
--- p.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