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새들은 더 추운 겨울로 가기 위해 새끼들에게 먼저 배고픔을 가르친다. 제 품속에 품고 날마다 물어다 주던 먹이를 끊고 대신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킨다. 누렇게 풀들이 마른 고수부지엔 지친 새들이 오종종 모여들고 머뭇대는데 어미 새는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음울한 울음소리만이 높은 빌딩 유리창에 부딪쳐 아찔하게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가난한 가을」 중에서
우체국 옆 기찻길로 화물열차가 납작하게 기어간다 푯말도 없는 단선 철길이 인생이라는 경적을 울리며 온몸으로 굴러간다 덜커덩거리며 제 갈 길 가는 바퀴 소리에 너는 가슴 아리다고 했지 명도 낮은 누런 햇살 든 반지하에서 너는 통점 문자 박힌 그리움을 시집처럼 펼쳐놓고 있겠다 미처 부치지 못한 푸른 편지를 들고 별들은 창문에 밤늦도록 찰랑이며 떠 있겠다 ---「푸른 편지」 중에서
아직도 시를 읽는 독자 있어요 그럼요, 단 한 사람의 독자가 있을 때까지 시인은 시를 쓰지요, 말해놓고 나는 눈 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는 바로 그 시를 쓴 시인 자신인걸요. (…) 그 백지의 시 몇줄에 필생을 건 나는 언제나 긴급 안건은 그것뿐이라고 나는 내 시의 독자다, 혼자 소리친다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 중에서
그대가 원한다면 내 기꺼이 푸른 융단이 되겠다고 한 서약 아직은 유효합니다.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예초기가 나를 베어도 안과 밖이 평등한 잎잎이 되기 위해 강한 햇볕 아래 오체투지 하렵니다. 예각의 날을 세운 햇볕이 창날을 번뜩이며 화인(火印)처럼 박힌다 해도 등 뒤로 달라붙는 병든 벌레들 내쫓지 않고 습한 공기가 숨 막히게 가로막아도 마음속 사막 하나 키워 견디어내겠습니다. 집채만 한 환상과 꿈을 좇아 뜻하지 않게 돌풍이 와도 나른한 봄날같이 견디어내겠습니다. ---「잔디밭 이야기」 중에서
나는 다른 하늘을 꿈꾼다. 전생은 어느 인디언 마을의 원주민 본적은 움막을 틀었던 이억만년 전의 그 나무 화석이 있는 곳 얼음과 눈 덮인 언덕은 나의 요새였다. (…) 이억만년 전의 둥지에서 도자기에 새길 천연 이미지 얻으러 나왔다가 사시사철 흰 어금니만 한 잎새들 눈처럼 반짝이는 본적지 언덕에서 잠깐잠깐 나는 꿈꾸곤 한다.
노향림 시인의 시는 묘사시의 정석과 같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에서 시작한 그의 시는 후기로 올수록 그 맛깔스러운 묘사에 인간의 서사를 녹여내면서 어느덧 시대의 초상을 실감나게 그리는 원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일곱번째 시집 『푸른 편지』에는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시학을 연마해온 독보적인 장인(匠人) 의식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페넬로페의 베 짜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현대적 의미로 쉴 새 없이 하는데도 끝나지 않는 일을 가리킨다. 노향림 시인의 ‘베 짜기’는 현재의 시간 속으로 유년의 기억을 불러오고 사막같은 도시 공간 속에 푸르른 바다를 불러와 찬란한 생명의 무한한 시공간을 직조해내는 것에 있다. 그에게는 ‘페넬로페의 베 짜기’가 곧 무한히 열린 세계로 ‘푸른 편지’를 쓰는 언어적 구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