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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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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6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91189205362
ISBN10 118920536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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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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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고래는 없다 북양北洋의 흰 유빙遊氷 사이를 떠돌던 귀신고래는 이제 없다 구약 예레미야서 23장 6절과 졸피뎀 10㎎과 세작들의 우울한 저녁식탁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무슨 환부 같은, 페름기紀의 사력질 화석 안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참수를 금방 끝낸 IS병사의 검은 피 묻은 소맷자락에도 그의 검은 복면이 불현듯 돌아보는, 다마스쿠스 근교 와디의 눈부신 정적 속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나침반과 컴퍼스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사이버펑크시대, 봄비 같은 종아리들이 봄비같이 붐비는 부부스와핑의 현장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달빛 받는 AK-47소총의 푸른 그림자에도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미제사건 파일의 사건번호 목록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하마 마지막 숨을 느리게 쏟으며, 어느 늙은 북경원인이 무심히, 지켜봤을 주구점周口店의 택지재개발공사 같은 햇살 속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그 햇살 아래 비계처럼 가설되는 금잔화金盞花떼 속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무기밀매업자의 대장내시경에도 전직대통령의 차명계좌 잔고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구제역으로 집단폐사한 돼지들이 개처럼 모여 짖고 있을지 모르는, 화성과 목성 사이 소행성대의 춥고 어두운 중력방정식 안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밤마다 정치적 망명을 도모하는 한 시인의 물방울처럼 상傷한 시집 갈피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그대가 오래 울다가 깨어난 새벽, 도무지 기억해내지 못하는 꿈의 그, 으슥한 그늘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오늘 오후 두 시 십칠 분 속에도 귀신고래는 없다 그러니까 귀신고래는 없다
---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1
― 그러니까 귀신고래는 없다」 중에서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 ▒▒▒▒ ▒▒▒▒ ▒▒▒ ▒▒▒▒▒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 ▒▒ ▒▒ ▒▒ ▒ ▒▒▒▒ ▒▒ ▒▒▒▒▒, ▒▒▒ ▒▒▒, ▒▒▒▒ ▒▒▒ ▒▒▒ ▒▒ ▒▒▒▒, ▒▒▒▒ ▒ ▒▒ ▒▒ ▒▒ ▒▒▒▒ ▒▒▒▒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붉은 쉐나임을 벗어 돌 위에 개켰다 이마에 탱자나무가시관을 뒤집어 쓴 그는 온전히 흰 팬티 바람이었다 진작 목공질하여 땅바닥에 박아두었던 나무십자가를 등지고 서서, 잠시 어떤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허리를 굽혔다 왼손에는 펜치가 오른손에는 망치가 들려 있었다
그는 자기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집게발가락 사이의 우묵한 살집을 겨누어, ‘ㄴ’자로 구부린 쇠못을 펜치로 고정시킨 뒤, 망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의 망치질은 서두르거나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오른발의 복숭아뼈에 왼발의 복숭아뼈가 어슷하게 겹치도록 천천히 앉음새를 고쳤다 오른발과 마찬가지로 왼쪽 발등에도 힘과 각도를 침착하게 제어하며, 굵은 쇠못을 때려 박았다 딱, 딱, 딱, 망치소리가 폐채석장 이곳저곳에서 불찌처럼 작고 예리한 잔향을 일으켰다
잠깐 숨을 가다듬고, 그는 십자가에 등을 맡긴 채 도르래로 무거운 화물을 끌어올리듯이, 윗몸을 일으켜 세우려 애를 썼다 끝이 없을 듯 위로, 위로 향하는 오랜 굴신이 큰창자의 연동운동 같기도 했다
그는 듬성듬성 검은 거웃이 난 채 낡은 양가죽가방처럼 처진 아랫배를, 미리 십자가 중턱에 결박해 두었던 압박붕대로 비끌어맸다 오른손을 뻗쳐 근처에 갈무리한 식도食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압박붕대 틈으로 비죽이 불거진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에 그것을 푹! 쑤셔서 돌렸다 시동키박스에 시동키를 꽂아서 돌리듯이, 자신을 어디론가 운행하려는 듯이 사위는 새소리 하나, 벌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식도食刀를 내려놓고 핸드드릴을 골랐다 왼쪽 손바닥의 검지뼈와 중지뼈 사이에 드릴날을 곤두세웠다 드륵, 드륵, 드르르르, 짧게 쥐이빨 갈리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그것은 순식간에 손바닥을 관통했다 그는 구멍 뚫린 왼손으로 오른손의 핸드드릴을 받아 쥐려 했다 그의 동작은 전파간섭에 노출된 구형모니터처럼, 버퍼링이 걸린 VOD화상처럼 무너졌다가 끊기기를 몇 차례나 거듭했다 오른쪽 손바닥의 신경과 힘줄을 피해 조심조심 핸드드릴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두 손바닥을 나란히 모아 찬찬히 살폈다 상처자리가 석유시추용 천공 같았다 풀모기가 달겨드는지, 그가 불현듯 코앞의 허공을 휘젓는 시늉을 했다 어찌 보면 허공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성싶기도 했다
십자가 상단에 고정했던 밧줄을 끌어내려, 천천히 자신의 아래턱을 매달고 나서 뒤통수 쪽으로 매듭을 조였다 그의 프로세스는 설계기사가 제도판 위에 컴퍼스와 곱자로 제도하듯 정교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한동안 빈 철사옷걸이처럼, 무심하게 건들거렸다 터무니없이 밝게 벗겨진 정수리 언저리에서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혔다가는, 탱자나무가시관과 흰 털이 건성드뭇 뒤섞인 두 눈썹과 콧등을 타고 내려와, 허벅지와 발등께로 사정없이 굴러 떨어졌다
그는 기운을 수습하여, 십자가의 왼쪽 팔걸이에 동여매 두었던 압박붕대 틈으로 왼팔을 비벼 넣었다 빈 치약튜브에서 치약을 쥐어짜내려는 것처럼, 마지막 젖심까지 쥐어짜내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와인오프너로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를 비틀 듯이, 먼저 손봐 놨던 쇠못의 미늘에 자신의 왼쪽 손등을 비틀어 박기 시작했다

Eli Eli Lama Sabachthani!

그늘 한 점 들지 않고, 하얗게 내리쬐는 폐채석장의 양달 멀리서 바라보면 그는, 머큐로크롬을 흥건히 묻힌 채 꽂아 논 면봉 같을 거였다

[2]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 ▒▒▒▒ ▒▒▒▒ ▒▒▒ ▒▒▒▒▒ ▒▒▒, ▒▒▒ ▒▒▒▒▒ ▒▒▒ ▒▒▒, ▒▒▒▒ ▒ ▒▒ ▒▒▒▒,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 ▒▒▒ ▒▒▒ ▒▒, ▒▒ ▒▒ ▒▒ ▒▒, ▒▒▒ ▒▒ ▒▒ ▒▒▒▒▒▒

둘째 날, 영서내륙지방으로부터 발달한 불안정한 기압골을 따라 국지성 폭우가 쏟아졌다 비는 그가 수신하지 않은 주민세납부독촉장을 적시지 못했고, 평생 분주히 싸다닌 개인택시의 주행거리를 적시지 못했고, 지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서 닭곰탕 국물을 뜨다가 문득 들었던 잡념을 적시지 못했고, 차상위계층 신청서를 꾹꾹 눌러 작성하는 전처의 모나미볼펜을 적시지 못했고, 그가 공짜로 수선해 준 동료기사의 등유보일러와 3단변속 자전거를 적시지 못했다 비는 그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내가 어쩌다 한눈을 파는 것같이, 그저 쏟아져 내렸다
셋째 날 오전, 양봉업자와 전직 목사가 SUV차량을 타고 그의 지성소至聖所까지 와서, 나무십자가 여기저기 검정 비닐봉투처럼 매달린 그를 발견했다 양봉업자가 지역경찰에 신고했다 그 사이 전직 목사는 핸드폰카메라를 이용하여,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다양한 포즈와 각도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12 ― Anno Domini 2011년 4월 29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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