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웃고 있었다.
지루한 장마철의 눅눅함을 단번에 날려버릴 듯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빗방울이 맺힌 커다란 유리창 앞에 서서 그렇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단정했고,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매가 소년처럼 천진했다. 그가 웃자, 창 너머로 물기 가득한 선릉의 초록색 숲이 싱그럽게 출렁거리고 초록색을 품은 물방울들이 간지러운 듯 또로록 창가에 흘러내렸다. 챠콜 그레이 슈트에 눈처럼 하얀 셔츠를 입은 그에게서 녹음이 짙은 숲처럼, 막 깎아놓은 잔디처럼, 코가 찡해지도록 상큼한 풀 향기가 났다.
“은 대리, 인사하지. 당신 후임으로 온 안시강 대리.”
여자의 하얀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시강은 발끝에 힘을 주었다. 가녀린 손목이 살짝 드러난 하얀 재킷에 단정한 블랙스커트를 입고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틀어 올린 여자의 모습에서 빈틈이란 없었다. 시강을 발견하고 아주 잠깐 미세하게 흔들렸던 투명한 갈색 눈동자. 그 미세한 움직임만이 여자가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은선잽니다. 반갑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던 선재는 산들바람처럼 머리 위로 쏟아지는 웃음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하하. 선배! 나 모르겠어요? 시강이에요. 안시강.”
“…….”
안시강. 그 이름,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니.
쏟아지는 웃음을 외면하며 선재는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아 표정을 감추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는 사이인가? 아! 그러고 보니 학부가 같았지. 은 대리가 선밴가?”
두 사람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기준은 검은 가죽소파에 깊숙이 앉아 다리를 꼬고 발끝을 까닥였다. 대답을 기다리듯 기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 학번으로는 2학년 선배시죠. 선재 선배가…….”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 선재는 조금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하구나. 듣는 사람조차 기분 좋게 만드는 네 목소리는.
“그렇군.”
울림이 좋은 목소리에 잠시 멍해 있던 선재는 시강의 말을 짧게 끊어내는 기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선재 씨, 어떤 사람이었나? 그 때도 얼음공주였나?”
우리 선재 씨. 기준이 은 대리에서 우리 선재 씨라고 호칭을 바꾸는 순간, 시강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글쎄요. 선재 선배는…… 남학생들의 로망이었죠.”
“흐음, 로망이라…….”
길게 여운을 주는 기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강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입매만 살짝 올라갔을 뿐, 까만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너도 이제 요령이란 게 생긴 거니? 넌, 언제나 눈이 먼저 웃었는데. 눈이랑 입술이랑 얼굴이 모두 함께 웃는 사람이었잖아. 선재는 웃지 않는 시강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물었다. 시강아, 네게……도 내가 로망이었니?
“역시, 난 행운아인 건가? 한국 최고라는 엘리트들의 로망을 아내로 맞게 되었으니.”
선재는 휙 고개를 돌려 기준의 치켜 올라간 입술 끝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내리깐 눈썹이 빠르게 두 번 깜빡거렸을 뿐, 기준이 바라 본 선재의 얼굴은 고요한 연못처럼 담담했다.
깜빡, 깜빡.
깜빡이는 고운 눈썹을 바라보는 두 남자의 표정이 엇갈렸다. 역시라는 듯 입가에 살짝 웃음을 띠는 남자와 안타깝게 깊어지는 눈동자.
긴 속눈썹을 연달아 깜빡이지 않았다면 기준은 선재가 당황했음을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긴장하거나 당황할 때면 깜빡, 깜빡, 연달아 두 번 눈을 깜빡이는 선재였다. 처음, 선재를 보았을 때 선재의 그런 동작을 유혹으로 생각했다. 그 긴 속눈썹 뒤의 담백하고 말간 눈동자를 본 뒤에야 버릇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유혹이라……. 선재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선재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기준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단아한 얼굴도, 명민해 보이는 밝은 갈색 눈동자에도 흔들림은 없었다. 역시 은선재다.
여전하구나, 당신은.
당황할 때면 귀엽게 깜빡이던 속눈썹. 그 모습이 보고 싶어 짓궂게 장난을 치기도 했었다. 물끄러미 결 고운 속눈썹을 바라보다 시강은 손끝이 살짝 올라간 선재의 하얀 손가락으로 시선을 내렸다. 차가운 겉모습에서 유일하게 여린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손가락. 언제나 바짝 잘라 진주알처럼 동글동글하던 손톱. 그리고…… 조바심 나도록 살짝살짝 보여주던 수줍은 볼우물. 단정하게 겹쳐진 하얀 손에서 볼우물이 생기곤 했던 창백한 뺨으로 시강은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리운 듯 아련해진 검은 눈동자가 조금 더 깊어졌다.
아내…….
어쩌면 벌써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 말이다. 그런데도 아내라는 낯선 단어에 심장 깊숙한 곳에서 묵직한 둔통이 느껴졌다. 너무 단련되어서 별로 아프다 느끼지 못하는 심장인 줄 알았는데.
“아직, 언론에 흘릴 생각 없으니까 조심하길. 약혼식 전까진 보안 철저하게 부탁해.”
마주 앉은 두 사람을 남겨두고 기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풀어놓았던 은색 시계를 팔목에 두르며 경고하듯 집게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똑. 시계의 잠금을 채우는 순간, 노크소리와 함께 남 실장이 들어섰다.
“상무님,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갑시다.”
바람을 일으키며 사무실을 나서는 기준의 뒷모습에 조용히 목례를 하고 선재는 말없이 어지러운 데스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신 사납게 여기저기 흩어진 서류들을 정리하고 간단하게 챙겨 준 아침식사용 샌드위치 접시와 토마토 주스 잔을 치우고 떨어뜨린 빵부스러기들을 티슈로 말끔하게 닦아냈다. 보안키까지 꽂힌 노트북을 로그아웃시키고 보안키를 뽑아 데스크 서랍에 넣고 찰칵 잠갔다.
“선배.”
“은 대리라고 불러주세요.”
서류를 가지런하게 모으는 분홍색 손끝이 시강의 목소리에 살짝 흔들렸다.
“선배는 내가 반갑지 않나 봐요?”
“안시강 대리, 분명 반갑다고 인사했습니다. 기억 안 나세요?”
“선배…….”
성큼 다가온 시강이 선재의 팔꿈치를 잡았다. 선재의 손끝에서 툭, 서류철이 떨어져 어지럽게 데스크 위로 흩어졌다. 잠시 아무 말도 없이 흩어진 서류만 바라보던 선재가 무표정하게 시강의 손에서 팔꿈치를 떼어내며 서류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하자 시강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발그레한 하얀 손을 꽉 움켜쥐었다. 투두둑, 다시 쏟아지는 종이들.
부드럽고 서늘한 체온을 느끼는 순간, 시강의 심장이 꽉 죄어왔다. 사람의 감각이란 이런 건가 보다.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느껴지지 않더니……. 이렇게 손을 잡는 순간 잠자고 있던 모든 감각이 지독히도 예민하게 살아나서 시간을, 공간을 뛰어넘고 있었다. 처음 선재의 손을 잡았던 순간이, 온몸의 털이 맹렬하게 곤두서던 순간이, 하얀 목덜미의 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던 그 순간이…… 징그럽도록 선명하게 떠올랐다.
“선배, 결혼…… 해요?”
“…….”
성큼 다가와 자신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검게 그을린 시강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달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길쭉한 손톱 끝에 하얗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싱그러운 풀 향기가 현기증처럼 선재를 덮쳤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뜨끈한 열기가 팔을 지나, 어깨를 지나, 가슴을 지나 심장으로 아프도록 파고들었다. 숨을 멈추고 두 눈을 감았다. 이제 더는 시강의 향기가 자신의 후각을, 자신의 기억을 자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선배.”
“안시강 대리. 제 사생활입니다. 제가 그만두는 3개월 전까지 인수인계 확실히 받으세요.”
“…….”
시강은 천천히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손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선명한 손자국이 만들어지며 붉게 물들어가는 하얀 손.
“결코 헐렁하지 않을 테니, 각오하세요. 안시강 대리한테 회사에서 투자한 시간과 비용을 생각해요. 회사에서 키운 인재니, 이제 거둬들이는 순간이라는 거 알고 있겠죠? 회사는, 한기준 상무님은 절대 밑지는 장사 안 하는 사람입니다.”
“상무님이군요. 선배가 바라던 최고의 남자.”
한숨처럼 귓가에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 속에서 선재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귀를 세웠다. 무얼 찾고 싶은 걸까. 조바심? 안타까움? 아니면…… 질투?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호흡에 따라 낮게 들썩이는 하얀 셔츠에 감싸인 가슴뿐. 그 가슴은 오히려 평온해 보이기조차 했다.
“내게 프러포즈해준 사람 중에서는 상무님이 최고였어.”
조금 예민해 보이는 뾰족한 턱을 치켜 올리며 선재는 시강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29살 먹은 남자의 눈동자라기엔 지나치게 또렷한 까만 홍채와 지나치게 푸른 기가 많은 흰자위. 세월의 때가 비켜간 듯한 그 맑은 눈동자에 안도하는 제 마음이 못마땅해서 선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촉촉하게 반들거렸다. 이 방에 들어오면서부터, 누군가를 발견한 이후부터 내내 매캐하게 시큰거리던 눈이 결국 말썽이다.
“축하드립니다. 한기준 상무님, 멋진 분이시죠. 선배한테 잘 어울리는 분이라 생각됩니다.”
손등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꽉 쥐고 시강은 선재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입술의 양 끝만 살짝 올라간 미소. 조금은 억지 같은 미소에 오히려 위안이 되는 건 또 무슨 마음일까?
저 눈마저 웃고 있었다면……. 선재는 살짝 입술 끝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는 네가, 안 대리가 생각 안 해도 되는 문제예요. 안 대리의 관심, 불편합니다.”
단호하게 등을 돌려 사무실의 육중한 문을 열고 선재는 시강이 사무실을 빠져나가길 말없이 기다렸다. 시강을 외면하고 있은 선재의 눈동자가 긴 속눈썹에 가리어진 채 조금 더 젖어들었다. 스치듯 지나가던 짙은 브라운색 구두가 우뚝 멈춰지고 주저하듯 천천히 선재 앞으로 구두코가 돌려졌다.
“선배, 고마워요.”
“……?”
“화이트리넨. 변했으면 서운……했을 겁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강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입술로, 얼굴로, 온몸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시강을 바라보며 선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쏴아아아.
다시 내리기 시작한 여름비는 삭막한 사무실임에도 풀 향기를 더욱 짙게 피워 올렸다.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