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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대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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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7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52쪽 | 230g | 128*205*20mm
ISBN13 9791130814452
ISBN10 113081445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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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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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나들이 가는 길

건널목 맞은편에 서 있는
예쁜 귀마개를 한 소녀와
그 건너편에 서 있는 늙수그레한 사내가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유쾌한 상상

작은 나무처럼 서 있는
한 소녀의 자람이
나의 시듦으로 인한 것이라면
억울할 것 같지 않다는
즐거운 계산

신호등이 바뀌자
얼었던 풍경들이 스스로 풀리고
어려운 숙제를 푼 소년처럼
배시시 웃다
--- 「병원 나들이 가는 길」 중에서


아내가 눈병으로 고생하는 동안
장모님은 전화로만 안부를 물어오셨다
이삼 년 뒤면 구순이 되시는
장모님께 눈병이라도 옮길까 봐
아내는 전전긍긍했던 것인데
대신 내가 장모님 댁에 들러
연속극 재방을 같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언젠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드신 장모님 곁에서
한숨 푹 자고 오기도 했다

초록을 잃고서야 제 색깔을 얻은
백발의 억새가 눈부신 천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다

하루가 물 흐르듯 지나갔다
--- 「하루」 중에서


길 가다가 만난
풀꽃 한 무더기
허리께를 잘 모아 쥐면
한 아름의 꽃다발이 될 성싶어
손을 모으는 시늉만 하고는
막 돌아서려는데
눈이 유난히 큰 꽃망울 하나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가만 보니
눈망울이 작은 꽃들도
안 보는 척
곁눈질을 하고 있다
--- 「환대」 중에서


암 진단을 받고 나니
암일까 아닐까
가슴 조이던 시간들
이제는 안녕이다
좋은 일이다

나이 들면서
자리 잡기 시작한
조무래기 병들
명암도 못 내밀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다

가을을 사랑하는 일이
누구를 해치는 일은 아니겠으나
이렇게 마냥 행복해도 되는 건지
늘 미안했는데
좋은 일이다

걱정 근심 없이 살아온
내 몸에서도
암이라는 것이 자랐나 보다
세상 걱정도 하며 살라는 건지
좋은 일이다

암 진단을 받고 보니
많은 것들이 달라 보인다
세상은 더 아름답고
사랑할 것들이 더 많아졌다
좋은 일이다
--- 「좋은 일」 중에서


오래전에 폐경 선언을 한 아내와
생리대를 사러 동네 마트에 다녀왔다

전립선암 수술 후
보송보송한 여성 전용 생리대를
요실금 팬티 대용으로 착용한 지도
일 년이 다 되어간다

남자가 생리대를 차고 다닌다고
아내는 나를 놀리면서도
속내로는 짠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여자니까 당연한 일이지 했던 거다
피를 뚝뚝 흘려도 남의 일이었던 거다

아내가 반평생을 고생했으니
나는 반의반이라도 해야지

그러면 공평하겠다, 싶다
--- 「생리대 사회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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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집을 통해 안준철 시인이 시로써 도달한 좌표가 정확하게 읽힌다. 그 지점은“ 차가운 것 조금/따뜻한 것 조금/서로를 조금씩 내어놓고“”이내 알맞게 섞인” 자리다.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은 감정과 이성이 시편마다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는 “한 소녀의 자람이/나의 시듦으로 인한 것이라”는 우주 만유의 평균율을 읽어내는 시점과 지점에 이른 것이다.“ 안개는 풍경을 지워서 풍경을 만들지만/지독한 안개는 풍경을 만들지 못한다는” 중도의 통찰에 이르렀다. 모나거나 각지지 않은 시선과 언어가 편안하게 와서 안긴다. 안준철 시인의 시의 한 축을 이루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과 애정, 연대의식도 그 온도가 너무 과열되어 있거나 차갑게 식어 있지 않다. 그의 시에서는 36.5도 인간의 건강한 체온이 느껴진다. 자신의 삶과 세상을 향한 시선이 적정한 균형점에 도달한 것이다. 시의 표정들이 한결같이 편안하고 포근하다.“ 어려운 숙제를 푼 소년처럼/배시시 웃”는 시인의 모습이 선연하게 그려진다.
- 복효근 (시인)
그의 시는 공기처럼 가볍고 물처럼 맑고 투명하다. 파도에 쓸리는 모래알처럼 눈과 손에 쥐고 있을 수 없다. 해석과 의미를 계량키 위해 헛심 쓸 틈이 없다. 눈 녹듯 금세 마음으로 다가와 스며들어버리는 따뜻하고 착한 시들의 경지가 쉬운 듯하지만 높고 넓고 고매하다. 읽고 나면 내 마음도 어떤 안과 밖의 분별과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져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존엄과 아름다움에 동화되고 만다. 장식과 치장 없이 삶과 자연의 본질과 겸허를 향해 오직‘ 사랑’으로 육박하는 시편들이 어떤 잠언록보다 새롭고 귀하다. 이런 정직한 정신의 반석들 위에서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이끄는 시들이 참 고맙다.
- 송경동 (시인)
박명처럼 더욱 가난한 마음을 온전하다 여기게 하는 시인의 언어들은 결핍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지점에 돌 하나를 올려 그의 사랑을 살짝 건드린다면 무궁한 이야기가 쏟아질 가을 섬진강의 수묵화다. 그는 어떠어떠한 행위들로 그냥 시를 살고 있다. 아내를 살고 어머니를 살고, 특히 구순에 가까운 연로하신 장모님과는 한참 열애 중이다. 삶이란 파편처럼 피었다 지는 찰나임에도, 그 순간을 온전한 시간으로 빚고 있는 시인의 언어들! “눈길은 눈이 간 길이니 너를 바라본 것이 모두 길(道)”임을 알고 있는 그와 어언 25년을 함께해온 시간들이 지금도 언어 너머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 이민숙 (시인, 샘뿔인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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