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확인시켜 주시오!
약속 당일 저녁 6시 50분. 김강한은 지하통로로 들어선다.
여느 때처럼 조 영감은 벌써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멍한 시선을 허공에다 박아두고 있다. 김강한은 조 영감의 앞에다 하드 케이스 가방을 내려놓는다. 닫히지 않도록 잠금장치 부위에 면 테이프를 두껍게 발라둔 그대로다.
조 영감은 놀라거나 의아해하지도 않고 그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본다. 그가 준비해간 비닐봉지에서 소주 한 병과 족발 한 팩을 꺼내놓자 그제야 조 영감의 눈빛에 돌연 생기가 돈다.
“영감님, 이거 좀 가지고 있어요. 곧 두치 패거리가 찾으러 올 테니까 손끝도 대지 말고 그냥 가지고만 있어요.”
굳이 두치 패거리를 들먹거린 것은 조 영감이 혹시 엉뚱한 호기심이나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미리 겁을 주는 차원에서이다. 곧장 지하통로를 나온 김강한은 7시 정각에 윤 팀장에게 전화를 한다.
“돈 준비되었소?”
“물론입니다.”
윤 팀장의 대답이 간결하다.
“좋소, 그럼 지금 즉시 돈을 가지고 그 지하통로로 가시오!”
“지하통로에는 왜……?”
“내가 돈을 확인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지하통로에 가보면 저절로 알게 될 거요. 가는 데 얼마나 걸리겠소?”
“30분쯤… 걸립니다.”
“좋소, 그럼 7시 30분에 다시 전화를 걸겠소!”
김강한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는 휴대폰에서 배터리를 분리한다. 7시 30분. 김강한은 휴대폰에 배터리를 다시 결합하고 윤 팀장에게 전화를 한다.
“도착했소?”
“예. 지금 지하통로 안에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영상통화로 합시다.”
영상통화로 전환하자 지하통로 내의 풍경이 보인다. 윤 팀장과 그의 주변으로 건장한 사내 대여섯 명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10억의 현금을 지니고 있으니 단단히 호위를 붙인 것이리라.
“강 형 자리 바로 옆의 조 영감에게 하드 케이스 가방 하나를 맡겨두었소.”
윤 팀장이 곧장 조 영감에게로 가서 하드 케이스 가방을 화면에 비춘다.
“자, 이제 준비된 돈을 확인시켜 주시오.”
폰의 화면에 5만 원 지폐 다발이 비친다. 그리고 다발을 넘기면서 보여주는데, 확실하게 다발 속까지 5만 원짜리 지폐가 맞다.
“이제 하드 케이스 가방 안에 돈을 넣으시오.”
돈 다발이 하드 케이스 가방 안에 차곡차곡 채워진다. 이윽고 500만 원 다발 200개가 다 채워지자 가방 안이 꽉 찬다.
“잠금장치에 감긴 테이프를 떼어내고 가방을 닫으시오.”
찰칵!
하드 케이스 가방이 닫히며 잠기는 소리가 선명하게 전해진다.
“8시 정각에 다시 전화하겠소.”
그 말을 끝으로 김강한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단호하게 해치워야 할 마지막 액션!
택시를 타고 S호텔로 이동한 김강한은 호텔 앞에서 8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윤 팀장에게 전화를 한다.
“장소는 시내 S호텔이오. 9시 정각에 꼭대기 층의 레스토랑에서 만납시다. 아, 자리예약은 능력 있는 그쪽에서 알아서 좀 하소. 이왕이면 창가의 전망 좋은 자리로.”
전화를 끊고 김강한은 곧장 호텔로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탄다. 꼭대기 25층에서 내린 그는 화장실로 가서 등산복으로 갈아입는다. 모자까지 쓰자 거울에 비친 그는 제법 다른 사람 같아 보인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다. 걱정이나 두려움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긴장되고 흥분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마지막 한 가지만 남겨두고 있을 뿐이다. 지극히 간단한, 그러나 단호하게 해치워야 할 마지막 액션.
거울 속의 그가 문득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는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이는 것 같다.
[사기를 제대로 치려면 우선 배포가 있어야 되는 거거든. 그리고 큰 사기꾼은 먹을 걸 남겨놓고 가는 법이 없어. 먹을 수 있는 건 깨끗하게 다 먹고 난 다음에 바람처럼 유유히 사라지는 것, 그런 게 바로 사기꾼의 풍류(風流)라고 하는 것이지.]
화장실을 나온 그는 옥상으로 향한다. 얼굴에 와 닿는 밤바람이 시원하다. 잠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8시 45분이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그는 로비를 거쳐 회전문을 통해 현관으로 빠져나간다.
현관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듯이 잠시 어슬렁거리던 중에 시간은 이윽고 8시 55분. 그는 예의 그 분재소나무가 심긴 대형 화분들 중 하나의 뒤쪽으로 가서 호텔로 들어오는 경내 도로의 입구 쪽을 지켜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외제승용차 한 대가 호텔 경내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잠시 미끼로 쓰기에는 큰돈이잖아?
“조치는 제대로 취해져 있겠지?”
최도준의 물음에 윤 팀장이 나직하게 대답한다.
“예. 약속대로 그자가 나타나는 즉시 레스토랑이 있는 25층은 원천 봉쇄됩니다. 빠져나갈 구멍은 전혀 없습니다.”
“큰소리치지 말고 확실하게 체크해.”
“염려 마십시오.”
윤 팀장의 시선이 힐끗 차의 뒤쪽 유리 너머를 향한다. 15인승의 승합차 한 대가 그들의 차를 뒤따르고 있다.
차가 이윽고 호텔 현관 앞에 선다. 앞자리 조수석의 경호원이 재빨리 내려서 뒷문을 열어준다. 최도준이 먼저 내리면서 윤 팀장에게 한 번 더 주의를 준다.
“가방은 윤 팀장이 직접 챙겨. 잠시 미끼로 쓰기에는 큰돈이잖아?”
“예, 알겠습니다.”
윤 팀장이 하드 케이스 가방의 손잡이를 잡은 손아귀에 다시 한번 힘을 꽉 준다. 승용차의 뒤로 정차한 승합차에서 정장 차림의 건장한 사내 십여 명이 우르르 내리고 있다.
바람처럼 사라지다
김강한은 차에서 내리는 사내를 보고 있다. 경호원의 정중한 태도에서, 그리고 뒤이어 내려 옆으로 따라붙는 윤 팀장의 모습에서 그 사내야말로 대표일 터다.
삼십 대 초중반쯤이나 되었을까? 중간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 가지런히 빗어 넘겨서 이마 위로 붙인 머리 하며, 느긋하게 주변을 돌아보는 시선, 그리고 일자로 물린 입매 등에서 젊은 나이치고는 사뭇 무게를 잡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김강한은 대표에 대해서는 다만 그렇게 일별을 했을 뿐이다. 그의 모든 주의는 곧바로 윤 팀장에로, 아니, 그가 바짝 당겨 들고 있는 하드 케이스 가방으로 향한다.
크기, 색상, 디자인, 그리고 무엇보다 가방의 양면에 붙여진 곰돌이 스티커에서 그것은 10억 원의 현찰이 담긴 바로 그 하드 케이스 가방이 확실하다. 1시간 남짓에 똑같은 가방을 구하고 다시 똑같은 스티커를 구해서 붙이기는 어려울 테니까.
승합차에서 내린 십여 명의 정장사내들이 재빨리 대표와 윤 팀장 주변으로 벌려 설 때, 김강한은 분재소나무가 심긴 대형 화분 뒤에서 나와 슬그머니 그들에게로 다가선다.
그런 그의 움직임이 사뭇 묘하다. 뛰는 것도 아니고 마치 뱀이 미끄러져 가는 것 같은데 빠르다. 빨라도 보통 빠른 게 아니어서 정장사내들이 ‘어?’ 하고 경계하는 기색들이 될 때 그는 벌써 윤 팀장의 곁으로 다가선다. 그러고는 곧장 하드 케이스 가방을 낚아챈다. 와중에 가장 먼저 경각심을 표출한 것은 바로 대표이다.
“야! 저 새끼 뭐야?”
대표의 고함 소리에 정장사내들이 그제야 화들짝 비상이 걸리며 일제히 고함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 새끼 잡아!”
“덮쳐!”
“길목을 막아!”
그때 김강한은 이미 서너 걸음쯤 떼고 있는 중이다. 다만 한 걸음이 사오 미터쯤이나 되니 이미 이십여 미터쯤의 거리를 쭉쭉 뻗어 나간 중이다. 그리고 그의 보폭은 더욱 커진다. 오륙 미터쯤으로.
순식간에 호텔 경내를 벗어난 김강한은 미리 봐둔 경로대로 움직인다. 보폭은 더욱 늘어나 이제는 육칠 미터나 된다. 갑자기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그의 질주에 몇몇 행인들이 놀라 뒤를 돌아본다. 그리곤 재차 놀란 듯이 눈을 비빈다.
정장사내들이 뒤늦게 호텔 밖으로 달려 나왔을 때 김강한은 이미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진 뒤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