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마셨어.”
“아이, 괜찮아요. 이 정도쯤은.”
말을 하면서도 실실 새어 나오는 룩희의 웃음이 어째 불안하게 느껴졌다. 룩희의 입에서 후욱 터져 나온 한숨과 함께 달짝지근한 알코올 향이 풍겼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
“그럴까요? 아……, 기분 좋다.”
딱 기분 좋을 만큼 마셨는지 헤벌쭉 웃는 표정을 유지한 룩희가 일어나 거실 창으로 향했다.
“보이는 풍경은 비슷한데 병원이랑은 참 많이 달라요. 역시 이 오피스텔은 거실 창으로 보는 밤풍경이 운치 있다니까요.”
류도 그런 생각을 했다. 방음이 문제긴 해도 나름의 운치가 있는 작은 집이다. 하지만 류는 불량스런 방음 문제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신나는 선율로 댄싱 퀸을 선물하는 그녀가 옆에 있으니까.
룩희는 호흡을 길게 가다듬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맑은 두 눈이 천천히 주변을 감상했다. 커다란 창으로 느껴지는 청아한 바람, 반짝이는 불빛들. 그리고 그녀의 등 뒤를 지키고 선 류. 조금씩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 오는 류의 모습이 유리창을 통해 비쳤다. 순간 아찔한 취기가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너무 많이 마신 걸까? 그의 숨소리가 가까워져 올수록 그녀의 심장은 울렁거렸고, 귓속은 멍멍 울려 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느새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 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잔잔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에 올리려던 류의 손이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그의 다정함은 등을 돌리고 있어도 한눈에 보였다. 창으로 비쳐지는 그의 망설임에 룩희가 씩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서자, 지레 놀란 류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하는가 싶더니 돌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순간, 촉촉한 무언가의 습격이 룩희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룩희는 주춤거리며 창에 몸을 바싹 기댔다.
“……취하셨어요?”
그가 입술을 놓아주자 룩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류는 대답 대신 애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응답에 룩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하하……. 취하신 거죠? 아무리 취하셔도 그렇지, 이런 실례가 어디 있어요?”
룩희는 금세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이런 느낌이구나……. 불쾌했다면 미안해.”
그의 사과에 엷은 미소를 보이던 룩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조금 놀랐어요. 그리고…….”
룩희가 뒷말을 흐리자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았던 류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말끝을 흐리던 룩희의 입술이 달싹인다.
“사실, 저……키스 첨 해봐요.”
룩희의 말에 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떼며 취했느냐고 질문했던 자신이 매력 없는 여자로 보였을까?
그의 시선을 외면한 룩희가 발그레하게 취기가 오른 뺨을 감싸 쥐었다.
“음……취해선가? 영화처럼 그럴 줄 알았는데……. 혹시, 제가 눈을 뜨고 있던가요? 이럴 땐 눈 감는 거죠? 에이……, 실망이었어요. 전 아무것도 못 느꼈거든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무것도?”
룩희는 더욱 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뺨을 류에게 들키기 싫어서 창 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등 뒤에 서 있던 류가 그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살며시 어깨 위로 내려앉은 그의 손이 봄볕만큼 따스했다.
“허락……해줄래?”
조심스런 류의 말에 룩희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갑작스런 그의 키스 때문에 확 달아났던 술기운이 다시금 그녀의 머리를 울려 댔다. 류는 침묵을 지키는 룩희의 어깨를 등 뒤에서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와 귓가를 맴돌던 그의 입술이 조용히 속삭였다.
“두 번째 키스…….”
천천히 뺨을 타고 귓가를 스치던 그의 숨결이 입술에 닿음과 동시에, 룩희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류는 그녀의 등을 포근히 안은 채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초콜릿처럼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룩희의 어깨가 조금씩 느슨해짐을 느낀 류는 그녀의 작은 뺨과 귀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작고 도톰한 입술을 열고 들어갔다. 입술에서 풍기는 알싸한 술 향기에 이어, 페퍼민트처럼 싱그러운 입술과 달콤한 혀가 그의 혀끝에 닿았다. 천천히, 천천히, 부드럽게…….
그녀를 어루만지던 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끝을 부유했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던 그는 그녀의 작은 입술을 자신의 혀끝으로 부드럽게 핥았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눈빛과 마주치던 류가 입술을 떼며 낮게 속삭였다.
“어때?”
“음…….”
생각에 잠긴 듯 가는 눈을 뜨던 룩희는 잠시 뒤 적당한 표현을 찾았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아! 메밀묵 같아요. 간장 안 뿌린 메밀묵.”
메밀묵? 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눈동자에 박힌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아이의 동심처럼 반짝 빛을 냈다.
“큭, 큭큭큭…….”
뚱딴지같은 룩희의 말 때문에 한창 분위기에 사로잡혔던 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나쁘진 않았어요. 제가 메밀묵을 좋아하거…….”
룩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류는 그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기세로 그녀의 몸을 돌려세워 자신의 품속으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아 하고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룩희는 마음속으로 짧은 신음을 쏟아 냈다. 점점 곤두박질치는 심장 때문인지, 불에 덴 듯한 뜨거움이 가슴 가득 밀려들었다. 그의 완력이 너무 강했던지 그녀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녀의 현기증을 유발하는 것은 비단 취기만이 아니었다. 도톰한 입술을 열고 들어와 입안을 긁어 대는 그의 혀와 가녀린 허리를 부드럽게 쓸고 있는 섬세한 손길이 그녀를 더욱 어지럽게 했다. 그는 숨어 있던 그녀의 본능을 짧은 순간 강하게 자극했다.
룩희의 등을 부드럽게 쓸던 류의 손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지나 목과 귀를 어루만졌다. 처음 접하는 낯선 자극에 룩희의 몸이 움찔 놀라긴 했지만, 왠지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는 듯, 서서히 어깨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작은 가슴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달콤한 그녀의 입술에 아쉬움을 느낀 자신과 달리 룩희는 키스를 메밀묵이라 표현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귀여운 여자였다. 그리고……정말 사랑스러운 여자다…….
“아……반칙이에요.”
그와 간신히 몸을 떼어 낸 룩희가 탄성을 내지르며 세 번째 키스에 대한 경고를 했다. 희미한 미소를 보이긴 했지만 두 번씩이나 탄성을 내지른 그녀의 표정은 무척 얼떨떨해 보였다.
시간이 멈춘다는 게 바로 이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일까? 룩희는 예고도 없이 자신을 덮친 그의 입술에 정신이 멍했다. 확실히 메밀묵은 틀린 표현이었나 보다. 자신의 입술과 몸을 정성스레 어루만지는 그의 입술에 아쉬움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류는 룩희의 등을 돌려세워 창밖을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고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차가운 유리벽이 손끝에 닿는 동시에 뜨겁게 뛰는 그의 심장이 등에서 느껴졌다. 경직된 룩희의 표정과는 달리, 류의 표정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류의 턱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코끝에 사르르 스치는 그의 향기. 신선한 미야 향에 이성이 마비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면 정말 취해 버린 걸까? 취기이든, 최면이든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룩희의 가슴이 속삭였다. 조금 전 그녀를 선택했다며 혼잣말하던 류의 가슴처럼.
“류 과장님?”
“……짧게 불러 주면 좋을 텐데.”
“짧게? 어떻게요?”
한동안 그에게 안긴 채 창밖을 바라보던 룩희가 몸을 돌리려 하자, 류가 팔에 힘을 주었다.
“뒤에 붙은 과장님이라는 소리만 빼면 돼.”
류……. 룩희가 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그가 들었을까? 등으로 전해지는 그의 심장이 리듬을 타며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룩희는 몸을 돌려 그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었다. 애잔한 그의 눈동자. 까맣게 빛나는 흑요석처럼 유혹적인 눈동자다. 마주친 눈빛이 허공에서 맞물림과 동시에, 류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룩희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키친 바 위에 그녀를 앉힌 류는, 그녀의 무릎 사이에 몸을 들여 한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부드럽게 룩희의 뺨을 어루만지던 류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널 가질……기회를 줘.”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