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는 원래 독립적인 왕조국가였다. 류큐琉球. 옛날 오키나와에 있었다는 나라다. 달리 중산中山이라고도 한다. …… 류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책봉-조공 체제의 어엿한 일원이었다. --- p.22
오키나와 섬에는 오랫동안 ‘구스쿠’라고 하는 성채城寨를 기반으로 하는 지배자들이 병립하고 있었다. 그 지배자들을 ‘아지按司’라고 하는데, 몇몇 강력한 아지들을 중심으로 점차 중산, 남산, 북산의 세 세력으로 정립되어갔다는 것이 통설이다. --- p.23
류큐사는 1609년 사쓰마의 침략을 분기점으로 그 이전의 ‘고류큐古琉球’, 이후의 ‘근세 류큐’로 나뉜다. …… 1872년 메이지 정부는 …… 류큐 번왕藩王으로 삼는다는 취지의 조문詔文을 내렸다. 이른바 ‘류큐 처분’이라 지칭되는, 일련의 류큐 흡수 과정의 개막이었다. --- p.25
류큐 왕권을 떠받친 사상적 토대는 동아시아 문명권 공통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유교와 불교만이 아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가적 여성 사제司祭의 존재다. ‘노로’라는 이름의 여성 사제들은 남성 관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국왕의 사령서를 받아 임명되었고, ‘우타키御嶽’라는 성소聖所에서 행해지는 왕조의 공적 의례를 주관했다. --- p.32
‘와카 데다’로 칭송되는 ‘이쿠사모이’는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의례 공동체를 지배하는 최고 수장이었다. 이소공원의 오모로 비碑에 새겨진 노래는, ‘에소의 이쿠사모이’라는 군사 영웅적 지배자를 ‘와카데다’라는 태양의 표상으로 찬양하는 노래다. --- p.53
남쪽 지방의 아지였던 상파지尙巴志(쇼하시 1422~1439)가 세력을 점차 확장하고 슈리 지방을 거점으로 확보하면서 통일 류큐 왕국 상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배자를 데다로 간주하는 전래의 관념은 왕권 독점적인 데다코 사상으로 발전해갔다. --- p.66
태양왕의 세지는 늘 충만하거나 늘 새로울 수는 없었다. 태양의 빛이나 볕은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류큐의 신화적 상상력은 약화된 세지가 강화되고 소진된 세지가 다시 차오르는 신화적 공간을 창안해냈다. ‘데다가아나テダガ穴’, 우리말로 풀면 ‘태양의 굴’이 바로 그것이다. --- p.67
세화 우타키는 ‘오아라오리御新下り’라고 하는, 류큐 왕조 의례의 핵심적 행사 중의 하나가 거행되던 곳이다. ‘오아라오리’는 ‘기코에오기미’라고 하는 여성 사제의 즉위식이다. --- p.102
‘기미테즈리’란 류큐 개벽 이후 풍속이 순박하던 상고 시대에 출현했다는 신들 중의 하나다. 새 국왕이 왕위에 오르면 출현하여 왕의 장수를 축복했다고 한다. --- p.110
슈리성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환회문은 원칙적으로 국왕이나 외국의 사신, 남성 관료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었다. 왕비나 귀부인들은 구경문久慶門을 이용했고, 일상적으로는 계세문繼世門이 슈리성의 출입구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계세문은 세상을 잇는다는 뜻의 ‘계세’라는 말 그대로, 선왕이 승하한 후 대를 이을 세자가 궁에 들어올 때 통과하는 문이기도 했다. --- p.136
류큐 섬이 있던 자리는 애초에 바다였다. 물결만이 이리저리 넘실대는 망망대해, 바다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 바다 위에 섬을 처음 만든 것은 ‘아마미쿠’다. 아마미쿠는 하늘에 사는 신이었는데, 천제의 명령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류큐섬을 만들었다. 아마미쿠는 류큐섬만 만든 게 아니라, 그 섬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생겨나게도 했다. --- p.147
그 처음(하늘과 땅의 자리가 정해지고 인물이 생겨났을 때: 필자)에 일남일녀가 화생化生했다. 남성은 여성을 품고 여성은 남성을 따르니 시간이 지나자 저절로 부부의 도가 이루어져 인륜의 시초가 되었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군왕의 시초로 천손씨天孫氏라 하고, 차남은 아지의 시초, 삼남은 창생蒼生의 시초, 장녀는 기미들의 시초, 차녀는 노로들의 시초이다. 오륜이 닦이고 큰 도가 시작되었다. --- p.163
순천 왕통의 시조 손톤, 순천왕의 혈통은 …… 초월적 신성성이 아니라 인간의 가계, 일본의 유명한 무사 가문인 미나모토 가문, 즉 겐지源氏에 닿아 있다. --- p.210
혜조 세주는 곧 천손씨의 후예다. 당시 혜조는 이소伊祖의 아지가 되어 선을 행하고 덕을 쌓았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 후손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만년에 이르러 그 처가 품에 해가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이후 신 것을 좋아하고 밥을 싫어하니 이전에 꾼 꿈이 태몽이었음을 알아차렸다. 달이 차서 몸을 푸는 날이 되었는데 상서롭고 기이한 광채가 방에서 나와 구름을 뚫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찼다. 한 남자 아이를 얻으니 혜조가 기뻐하며 보배와 같이 아꼈다. 이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천일지자天日之子라 하였다. --- p.218
작은 섬 이제나지마의 가난한 백성 출신으로 상태구왕 때 나라의 창고를 담당하던 관리가 새로운 왕통의 시조가 된 데에 대해, 사서는 상원왕이 가나마루였던 시절의 여러 일화들을 열거하며 그가 왕이 된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한다. 이 일화들이야말로, 왕이 된 가나마루, 상원왕을 위해 사서가 재편해낸 ‘신화’였을 터다. --- p.278
찰도왕은 아버지가 평범한 인간이기는 했어도, 그 어머니는 날개옷을 입고 천상과 지상을 오가는 ‘천녀’였다. 찰도왕의 몸에 흐르는 절반의 피는 천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 p.290
상원왕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중산세감』과 『중산세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현재의 구비 전승으로는 전해진다. 한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는데, 상자 하나가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어부가 상자를 건져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남자 아이 한 명이 들어 있었다. 어부는 서둘러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아이를 보여주었다. 아내는 하늘이 내려주신 아이라고 기뻐하며 소중하게 길렀다. --- p.292
시마의 시초 때, 아단이 자생하여 번성하자 뒤이어 소라게가 나무 뿌리 밑에서 구멍을 내고 “카뿌리-”라고 말하며 나타났다. 다음으로 그 구멍에서 “카뿌리-”라고 외치며 인간 남녀 두 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이 배고픔을 느껴 아자네부라를 보았는데 커다란 나무 열매가 익어 있어 그것을 따 먹었다. 이후 그것을 먹으며 목숨을 이어 자손이 번창하였다. ---p.382
류큐 왕국의 신화는 역사적 장르다. 이 말은, 신화가 역사의 문학적 서술이라는 뜻은 아니다. ‘아마미쿠가 천상에서 오키나와로 내려왔다’라는 신화를, ‘문화적으로 발전된 곳에서 오키나와로 도래한 이주자 집단이 있었다’라는 역사로 읽을 수 있다는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류큐 신화가 역사적 장르인 까닭은 역사 속에서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여러 집단의 사유, 여러 집단의 사고방식이 류큐 신화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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