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는 잔을 부딪치며 약속했다. 평소엔 각자의 삶을 살다가 부부의 모습이 필요할 땐 언제든 최고의 배우자가 되어주기로.
지환과 희원은 서로에게 그 이상 발전하지 않는 호감을 느꼈다. 사실은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상대가 나를 사랑할 리 없다는 것.
내가, 상대를 사랑하게 될 리도 없다는 것. 아마도 기대하기를 최고의 쇼윈도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 p.178~179, 1권
“결혼도 마찬가질세. 불확실한 미래의 안락을 위해 확실한 오늘을 결혼으로 묶어두는 거지. 함께하는 것만이 안락을 가능하게 하니까. 본디 인간이란 혼자라는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거든. 무엇이건 확실한 것만이 시간에 커지는 불안함을 이겨낼 수 있다는 걸 본능으로 아는 것이오.”
“…….”
“그래서 남녀가 만나고, 정을 쌓고, 한 몸처럼 닥치는 세월을 견디는 거요. 먼 미래의 불안함을 잠식하려고.”
불안함.
“혼자는 절대로 불안함에 대한 면역이 생기지 않는 법이거든.”
그녀와 그는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태초의 불안함.
--- p.274~275, 1권
“해봐요.”
“……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그의 시선이 술잔에 닿는다.
“해봐요. 이길지 질지는 모르겠지만. 싸워봐요.”
“당신의…… 과거와…… 싸우라는 말인가요?”
“할 수 있다면. 해줄 수 있다면.”
우리의 끝은 어디인가. 열리고, 닫히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권희원 씨의 각오 그대로 꼬셔봐요. 힘껏. 열심히. 내 과거와 싸워서, 이겨봐요.”
“…….”
“당신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으니까.”
그는 아직 우리의 미래를 보지 못했다는 눈길을 들었다. 여전히 마음은 닫혀 있고,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사는 나이지만, 나도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할 수 있다면 해줘요, 그렇게.”
당신과 함께. 어쩌면. 어쩌면.
“건투를 빕니다.”
그게, 당신이라면.
--- p.110~111, 2권
……부부란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을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니었다.
“요즘 나 와인 좀 잘 마시는 것 같아. 안 그래요? 취해서 검사실 구경하던 내가 아니라고요.”
“얼굴은 빨개져선, 혀도 꼬이는 주제에 무슨.”
“아아 그런가? 근데 요즘 와인이 맛있어. 비싼 것만 먹어서 그러나?”
“좋겠네. 비싼 와인만 마시고 다녀서.”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서로의 밑바닥을, 진정으로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겨우 출발선을 지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이란 길고도 먼 여정이었으므로.
--- p.331~332, 2권
그대가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기쁨이 나로 만들어져 나로 끝나는, 그런 세상에 그대를 놓아주고 싶다. 작게는시선을 맞추는 일로부터,
“괜찮겠어?”
“뭐가?”
“쉽게 놔주지 않고, 쉽게 재우지 않을 거야.”
크게는 그대의 숨결을 내가 집어삼키는 것까지. 내가, 그대로 인해 살아 숨 쉰다면 좋겠다.
“네. 좋은데요.”
단지 그뿐이라면, 좋겠다.
--- p.37, 3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나의 배우자. 확신보단 추측이 많은, 배우자의 성격과 지난 삶.
……그녀는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일평생을 함께하는, 부부란 무엇인가.
“자꾸자꾸 벗자. 우리, 겹겹이 싸인 진짜 내 모습을 자꾸 보여주자고요. 한 꺼풀, 한 꺼풀.”
모든 순간을 청춘의 남녀로 서 있을 순 없겠지. 뜨거웠던, 간절했던 마음은 팔팔 끓는 세월 속에 증발해버릴지도 모른다.
“다 말해줘서 고마워, 서지환 씨. 쉬운 일 아니란 거 알아요. 이젠 정말로 편해졌으면 좋겠어.”
때마다 어깨를 내어줄래요. 다소 식어버린 내 손을 잡아줄래요.
“그리고 나한테 더 잘해. 알겠어? 서지환 씨?”
부르튼 내 입술에 온기를 불어줘요. 메마른 내 눈빛을 따뜻하게 바라봐줘요.
“지금도 물론 잘하지만, 더 잘해. 더 열심히.”
“네. 부인. 알겠습니다.”
“좋았어. 그 대답만 믿고 살 거예요. 나는.”
그럼 나는 다시 태어나듯 깨어나 당신을 사랑할 테니. 흘러간 오늘을 떠올리며 당신의 허리를 끌어안을 테니.
--- p.224~225,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