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이 들어오는 날, 사무실 안의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활기가 넘치곤 했다. 모두가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모여앉아 포장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그때 우리에게는 직원보다 포장하고 술 한잔 같이 하려고 오는 친구들이 훨씬 더 많았다. 한 번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비닐 포장지에 음반을 우겨넣고 헤어드라이어로 압축시키는 그 과정은 정말로 단순하기만 해서 어느 때엔 대화도 없이 몇 시간씩 가내수공업에 매달리기도 했다. 우리가 수입한 음반을 한구석에 재생시켜둔 채 낡고 비좁은 사무실에 무척 어울리는 일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는 것이다. 으슥한 밤이 되면 떡볶이나 캔맥주가 등장하는 건 당연지사. 천막집에서 이사 와서 기껏 슬래브 지붕 아래 비를 피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마음만큼은 대저택 부럽지 않은 그런 시절이었다. 그것은 아마 ‘정착’이라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이 많아진다는 것,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 이렇게 지속되기만 하는 삶이란…--- 「수입 CD상」
어느 날 아침 출근길,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과거의 노래에 질끈 눈을 감으면 빛보다 빠른 속도로 과거의 그때로 회귀해버리고 마는 순간이 있다. 잊고 있던 향을 맡는 순간, 나를 고통에 빠뜨렸던 첫사랑의 기억이 스미는가 하면 언젠가 처음으로 떠나던 배낭여행의 설렘이 떠오르기도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과 같은 역할이랄까. 그들이 만든 상큼 새큼 우울한 음악이 공중에 빛보다 빠르게 흩어졌다가 다시 누군가의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다. 비오는 날은 습기를 머금고, 안개가 낀 날은 안개를 머금은 기분 좋은 기억들. 이런 근사한 일이 라디오를 통해서는 가능했던 것이다.--- 「내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온다」
우리는 이미 주성인 ‘시리우스A’가 아닌, 홍대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역에 반짝이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시리우스B’와 같은 연약한 별들이 성공하기를 그토록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누군가와 경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당한 때에 나와 시리우스B와 같은 음악을 했고, 마침내 그 빛을 다해 소멸하였다.--- 「굿바이, 미스티 블루」
돌이켜봤을 때 파스텔뮤직의 행보가 순탄치만은 않았고 수많은 갈림길에서 방황하다 끝끝내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재밌어하는 것을 해오고 있다. ‘정말 재밌었던 것일까?’스스로 물었을 때, 재미없었으면 결단코 하지 못했을 일들이 너무도 많다. 지금 내가 내딛는 발걸음이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시간이 비켜가길 기다리면 된다. 그러다가 다시 걷는 게 재밌어질 때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내 길을 걸어가면, 그러면 된다. 그 끝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많은 시간 돌아갔다가, 쉬었다가, 일어서 다시 걷길 반복할 것이다.--- 「Hurry up! We're Dreaming」
컴백 공연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공식적으로 해체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서로 미래를 기약하며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물리적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었지만 솔직히 다시 밴드 멤버들이 모여 공연을 하게 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끔씩 멤버들이 다시 모여 합주를 하고 곡을 만드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너무 아련하고 그리워서 가슴 아픈 적이 많았다. 헤어질 시기에는 멤버 간에 음악적인 갈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 당시에는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이 불가능할 만큼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잿빛 세상에 들어와 살아보니 깨닫는다. 우리가 얼마나 행운아들이었는지. 우리는 아무도 추지 않은 춤이었고 사랑보다 진한 술이었다.--- 「우리는 속옷도 생겼고 여자도 늘었다네 ‘술자리로의 초대’」
말로는 해결 못할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고, 기록되고, 착상되고, 목적이 생기고, 구체적인 계획들이 그려지고. 흔들리지 않게. 그렇게 오랜 시간 만들어나갔다. 나의 여행이, 노래가, 혼잣말이. 어떻게 남을지는 잘 모르겠다. 바라는 것은, 오래 들어도, 늘 한결같은 음악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것. 누군가의 새벽, 그 어느 한곳에, 위안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에피톤 프로젝트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
당신이 알고 있는 몇몇 음악가를 떠올려보세요. 아마 어렵지 않게 누군가를 생각해낼 수 있을 겁니다. 당신에게 충격과 자극을 안겨주지 않고도 보드랍게 당신을 감싸주던 그 음악을요. 마치 어린 시절 낮잠 잘 때 어머니가 배를 덮어주시던 담요처럼 포근하고 가벼웠던 그 음악을요. 퇴근길이나 하교할 때, 세상의 소음 속에서 지친 당신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매일 무심하게 걷던 똑같은 길 위에서도 문득 나무의 움직임과 온도와 바람을 느끼게 해주었던,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장면들에 당신만의 BGM이 되어주었던 그 노래, 그 음악을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단지 계속해서 당신에게 그런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과 우리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음악 속에서 느끼게끔 하고 싶은 것입니다.
--- 「Lucia ‘무엇과 무엇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