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집단이 어떤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할 것인지 판단하는 데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 중 하나가 ‘집단의 구성원에게 넉넉하게 주어질 수 있는 음식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소속 집단에게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 이는 인간의 안정 욕구와 관련이 있다.(고교 사회 시간에 배운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을 떠올려보시길 바란다.) 많이 주어진 음식을 맛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속한 집단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많이 주어진’이라는 조건은 그 집단이 처한 자연과 사회?경제적 여건 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오래도록 빵이 아니라 밥을 맛있다고 생각해왔다. 한국인이 선천적으로 밥을 맛있다고 생각하게끔 태어난 것은 아닐 터인데 말이다. 한반도의 자연은 몬순기후로 밀농사보다 벼농사에 유리하다. 값싼 밀이 수입되어도 국내산 쌀을 사 먹을 만큼은 경제적 여유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밥을 먹기에 적절하니 밥이 맛있는 것이다.
--- 「치느님 치느님 맛없는 치느님」 중에서
유기농을 넘어 자연재배를 한다는 농장을 보라. 하우스가 지어져 있고 무경운, 무비료라 하지만 그 안의 땅은 그 바로 밖의 땅과 다르다. 그 바로 밖의 땅이란 농경지가 아닌 자연의 땅을 말한다. 유기물 함량을 조사해보면 자연의 땅보다 하우스 안의 땅에서 훨씬 높게 나올 것이다. 한반도 자연의 땅은 유기물 함량이 극히 적어서 그대로 농작물을 재배하기 적당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위적으로 자연과 단절시키고 유기물 함량을 높인 땅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을 두고 어찌 ‘자연’이란 말을 붙일 수가 있는가. 이건 ‘자연’의 남용이고 오용이다. 반자연의 일을 숨기기 위한 전략이다. 나아가, 농업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큰 혼란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농업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반자연의 일이라고 생각하여야만 지속 가능한 농업에 대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 「유기농이 한국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중에서
노동자는 품을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먹을거리를 사는 사람들이다.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현실을 생각하면 도시농장을 운영하는 것조차 버겁다. 도시농장의 운영으로 농업의 가치를 확인하고 농민과의 연대를 생각하였다 하여도, 문제는 돈이다. 노동자의 주머니가 ‘우리 친환경 농산물’을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두둑할까? 인간은 경제적으로 최적의 조건에 있는 먹을거리를 확보하려고 하는데, 한국 노동자의 최적 먹을거리 안에 ‘우리 친환경 농산물’이 들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시민운동가들은 대체로 ‘선한 인간’을 그린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함은 돈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한국 노동자는 하루 평균 점심 비용으로 6,000원 정도를 쓰고 있으며, 이도 버겁다고 한다. 점심 메뉴 선택의 기준도 맛이나 영양보다 가격이다.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 편의점의 삼각김밥을 먹는 노동자들도 많다. 이 음식들이 정크푸드인 줄 모르고 먹는 노동자는 없다. 이를 먹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에게 ‘선도적 도시민’이 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정크푸드인 줄 모르고 먹는 노동자는 없다」 중에서
김치 종주국 선언을 하였고 ‘김치가 기무치를 이겼다’면서, 왜 한국인은 그 많은 양의 중국산 김치를 수입하게 되었으며, 또 왜 그 김치를 식탁에 올리고는 먹지도 않고 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서울김장문화제 등 김치 관련 행사에는 늘 수많은 종류의 김치가 전시된다.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여주려고 담근 김치이다. 옛날에 그런 다양한 김치가 있었든 없었든 그 김치들은 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의 삶과 아무 관련이 없다.
행사장에 전시된 그 김치들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현재의 한국인은 사계절 내내 대부분 배추김치만 먹는다. 중국에서 수입되는 김치도 배추김치이다.
--- 「한국인의 식탁에서 이루어진 김치 세계화」 중에서
문명 이전에 부족장은 정치인이며 제사장이며 요리사였다. 농경이 발달하면서 도시가 커지고, 더불어 인간 조직이 복잡해졌다. 부족장 하나에 정치와 종교, 요리를 다 맡길 수 없게 되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두고 ‘정교분리’라 하여 역사에서 배운다. 권력화한 정치와 종교는 인간 집단을 통제하며 그 권력으로 자신을 영예로운 듯이 포장하였다. 심지어 정치인과 종교인은 제 스스로 신이나 되는 것처럼 굴기도 한다. 그런데, 요리는 인간의 역사에서 별 중요하지 않은 듯이 밀려났다. 요리는 스스로 권력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시되었다.
요리사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 음식을 먹을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고, 그들을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 먹고 나서야 요리사가 먹는다. 이는 먼 옛날 부족장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부족장은 사냥물을 나눌 때에 자신이 먼저 선택하지 않는다. 맨 나중에, 부족원이 나누어진 사냥물을 다 가지고 난 다음에, 나머지 하나가 부족장의 것이 된다.
한국의 정치인에게서 나는 부족장의 그 위대한 전통을 보지 못한다. 다들 제 몫의 사냥물을 내놓으라고 아귀다툼이다. 앞에 나서 일을 도모하여도 내 몫을 버리는 것이 부족장임을 잊었다. 한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문명 이후에 부족장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배덕의 부족장’을 견제하도록 만든 것이 민주공화국의 선거 제도이다. 나의 몫을 주장하지 않고 사냥물을 골고루 잘 분배해줄 듯한 부족장을 스스로 뽑자는 것이 이 제도이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보면, 요리사가 자신이 한 음식을 스스로 먹으며 맛있다고 너스레를 떤다. 요리사가 정치인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보면 이런 별종의 일은 오래가지 않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이끌 참된 부족장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 「정치인과 요리사는 그 뿌리가 같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