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일의 필사본과 이인섭의 필사본은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두 필사본은 어법, 문법, 띄어쓰기가 다르며, 특히 김세일 필사본에는 탈자, 오자가 많고 누락되거나 불명확한 부분 역시 많다. 김세일 필사본의 경우 이인섭 필사본에 들어 있는 단락 전체가 누락되었거나 단락의 중간 부분이 빠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1958년에 작성된, 이인섭으로부터 넘겨받은 이함덕본을 30여 년 후인 1989년에 고송무에게 전달하기 직전에 급히 필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 보인다. --- p.23
1958년 당시 고려극장의 당책임비서였던 김진에 따르면, 홍범도가 직접 쓴 원본 「홍범도 일지」는 러시아 연해주의 한카이 구역에서 작성한 ‘일기’를 희곡 『홍범도』를 쓴 태장춘이 갖고 있었고, ‘일기’의 내용은 의병활동에 관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홍범도 일지」는 홍범도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한 후의 시기, 즉 빨라도 1938년 11월 이후의 어느 시점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김진이 1958년 3월과 4월 이인섭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홍범도가 직접 쓴 ‘원본’ 「홍범도 일지」를 이인섭의 자료제공 요청을 받은 김진의 지시로 희곡 『홍범도』를 쓰기 위해 홍범도를 자주 면담했던 태장춘의 부인 이함덕이 1958년 4월 16일 ‘등사’하여 이를 김진이 1958년 4월 17일자로 이인섭에게 발송한 것이다. ‘고려극장 필사본’ 또는 ‘이함덕 필사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47
홍범도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가했는데, 이르쿠츠크파는 홍범도를 상해파의 지도자인 이동휘에 맞서는 인물로 부각시키려 했다. 특히 홍범도는 조선독립군부대의 대장의 명의로서 레닌을 면담했는데 이때 레닌으로부터 “싸총, 100루블의 상금, 적군모자, 그리고 레닌이 친필서명한 조선군대장이라는 증명서를 선물로 받았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자유시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홍범도는 “몇 마디”로 답했다고 한다. --- p.191
청산리전투 전후 북간도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령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허근의 의군부 군대를 주축으로 하는 대한총군부, 그리고 대한국민회 소속 안무의 대한국민군이 먼저 이동했고, 뒤를 이어 홍범도·이청천의 대한의용군과 서일·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연합한 ‘대한통의부’가 이동했다. 이처럼 시차를 두고 노령 이만으로 이동한 이들 부대는 이만에 주둔하다가 무장해제를 당한 후 각각 러시아 아무르 주(흑룡주) 자유시로 갔다. --- p.192
1921년 6월 28일의 자유시참변은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계열의 독립군과 한인빨치산대를 탄압한 동족상잔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홍범도는 사건 당시 중립을 지켰으나 참변 이후 군사지휘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측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파쟁에 활용했다. 홍범도는 자유시참변 이후 체포된 상해파계열 한인장교와 병사들에 대한 재판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 p.202쪽
「홍범도 일지(일기)」는 표현은 ‘일기’ 또는 ‘일지’이지만, 매일의 일을 적은 명실상부한 ‘일기’는 아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3개의 필사본은 ‘일기’ 형식이라기보다 ‘약전’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대담상대가 있는 구술형식으로 서술된 부분도 있어서 「홍범도 일지」의 기초가 되었을 법한, 홍범도가 직접 쓴 다른 메모 또는 기록책이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 p.214
홍범도가 직접 집필했든 또는 태장춘이 홍범도의 구술을 받아썼든 관계없이 「홍범도 일지(일기)」의 원본은 분실된 것이 확실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 원본을 옮겨 적은 여러 필사본들이다. 우선 태장춘의 부인인 배우 리함덕이(그리고 또 한 사람이) 원본을 베껴 쓴 것이 있는데, 고려극장 당서기 김진이 1958년 당시 홍범도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던 항일투사 이인섭의 요청을 받아 베끼도록 한 것이다. 이를 ‘이함덕 필사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진은 1958년 4월 17일 이함덕 필사본을 우즈베키스탄 안디잔에 거주하고 있던 이인섭에게 건네주었다. 이인섭은 ‘이함덕 필사본’을 1958년 6월 10일과 8월 15일 두 번에 걸쳐 깔끔하게 정리했다. 편의상 이들을 ‘이인섭 필사본 1’, ‘이인섭 필사본 2’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p.217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 홍범도의 풍모와 인품에 대한 기억은 한결같다. 홍범도는 체격이 장수처럼 장대하고 인품이 온화하고 소탈하며 동지애가 두텁고 총을 잘 쏴서 동료 의병들의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