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치하 3개월 동안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우익이라 인민군에게 해코지당할 것 같아서 익산군 온수리로 혼자 피난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장남인 내가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인민군은 매일 한 집에 한 사람씩 노력동원에 참가하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했는데, 항상 집안을 대표해 내가 나갔다. 삼례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황방산에 참호를 파거나, 미군 폭격으로 손상된 철교의 교각을 보수하는 데 주로 동원되었다. 특히 교각 보수는 육체노동을 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 무척 힘들었다. 큰 모래가마니를 교각의 손상된 부분에 쌓는 단순노동이었지만 물 묻은 모래가마니를 등에 지고 경사진 교각을 오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보수하다가 공습경보가 울리면 철교에서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 숨어야 했다. 당시의 폭격은 정확도가 떨어져서 오폭이 대부분이었는데, 운이 나쁘면 빗나간 포탄에 맞아 죽는 경우가 많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공습의 순간에도 아이러니하게 밤하늘을 쳐다보면 편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 p.69, 「전쟁의 공포와 책임감의 무게」 중에서
내무부에서 권장하는 새마을사업도 많이 했다. 대표적인 것이 마을을 통째로 옮겨서 새로 조성하는 사업인데, 대부분의 군에서 하나 이상 사업을 수행했다. 순창군도 주변에 냇가가 있고 건너에 도로가 있어서 이동하기 적당한 지역을 찾아서 새마을사업을 벌였다. 그런데 내무부 지침에 따르면 마을 집들은 무조건 도로 쪽을 정면에서 바라보게 위치해야 했다. 지침을 그대로 따르면 모든 집이 동향이 되기 때문에 나는 남향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새마을과에서는 상부의 지침에 따라야 한다며 반대했다. 그래서 순창군의 마을은 남향으로 하겠다는 공문을 만들어 내무부에 올리고, 담당 직원들에게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질 터이니 나만 따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내무부에서 왜 지침을 어기냐면서 현지조사를 나왔다. 내가 조사결과를 직접 장관에게 설명하니, 지침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현지 사정에 맞도록 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나를 칭찬했다. 당시의 내무부는 무척 권위적이라 현지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탁상행정으로 기획하고 획일적으로 지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공무원도 책임지기 싫어서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지역행정을 책임지는 군수는 지역의 현실에 맞게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풍 사업에서 실패를 겪으며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피하지 않았다.
--- p.183~184, 「임중도원(任重道遠)의 순창군수 시절」 중에서
신청사 설계에 관해서는 특별히 신경 썼는데, 분명한 기준점을 갖고 있었다. 새로운 전주의 이미지를 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시청 앞에는 너른 광장이 조성되고, 주변에는 도시개발로 고층건물이 들어설 것이며, 뒤편으로는 40미터의 대로가 생기는 시청의 주변환경을 고려해서 설계하라는 것이었다. 저층이면 시청이 파묻혀서 주변 공간에 가리게 될 것이고, 고층이면 시민에게 불편하니 적절한 높이가 필요했고, 전통도시 전주라는 이미지가 담길 수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 시장실 창문은 전통 창틀로 해라, 민원인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관공서의 권위에 눌리기 쉬우니까 이를 피하기 위해 민원실을 도로보다 낮은 곳으로 설계해라 등등 세세한 부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설명하기는 간단하지만 실제로 디자인하기에는 어려운 요구였다.
전국을 대상으로 설계공고를 했더니 많은 설계회사가 응모했고, 결국 지상 8층 규모에 전통 기와지붕을 살리는 콘셉트의 디자인이 선정되었다. 당시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던 때여서 행정관청은 대부분 사각형의 획일적인 건물이었고, 디자인의 개념이 담긴 건물은 없었다. 그런데 시청사에 디자인이 도입되면서 ‘행정관청의 권위의식을 드러내지 않는 훌륭한 건물’이라는 호평을 많이 들었다.
--- p.236~237, 「지성통천(至誠通天)의 1차 전주시장 시절」 중에서
투서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전해 들으니 온갖 나쁜 내용이 적시되어 있었다. 첫째가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서 인사이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업소로 보낸 세 명의 과장 중 한 명이 투서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둘째는 뇌물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전주역 근처에 대지조성을 하면서 대지를 빼돌렸고, 업자에게는 아파트 한 채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비서하고 살림을 차렸다는 등 아홉 가지 내용이 망라되어 있었다. 보름 동안 조사를 했지만 문제점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조사관이 시장실에 들렀다. “긴 시간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20년 동안 수사관 생활을 했지만 시장님 같은 공직자는 처음 봤습니다. 공직생활을 오래 하면 대부분 구린 뭔가가 조사과정에서 나오는데, 최대한 했는데도 이렇게 깨끗한 분은 처음입니다. 저도 정읍 출신인지라 존경스런 마음에 한번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하기에 나도 뿌듯했다.
--- p.352~353, 「호시마주(虎視馬走)의 2차 전주시장 시절」 중에서
“사정이 시급하니 댐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댐을 건설한다면 외지인보다 내가 도지사일 때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더 이익이 될 것입니다. 나는 진안군수를 했기 때문에 지역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보상도 더 신경 쓰고, 보상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도 챙기고, 공사도 서둘러서 생활의 불편함을 적게 하겠습니다. 대청댐이 다목적댐 역할을 못 해서 서해지구가 항상 수해를 입는데, 이것도 해결이 됩니다. 그러니 일석이조 정도가 아니라 일석오조, 육조가 되는 것입니다. 진안군에도 절대 손해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마무리했다.
그리고 시간이 늦었지만 식사하러 가자고 했더니 위원대표가 한마디 하겠다고 나섰다. “지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네요. 고향이 수몰된다는 아쉬움만 참을 수 있으면 참 여러 사람이 혜택을 보겠네요. 댐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때문에 더 이상 반대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약속하신 충분한 보상과 빠른 공사에 대해서는 꼭 지켜주십시오.”라고 물러섰다. 나의 설득이 통하여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졌다.
--- p.437~440, 「마부위침(磨斧爲針)의 전라북도지사 시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