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말없이 흘러간다. 어느덧 내 나이 여덟, 아홉 살이 되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말끔히 새 옷으로 갈아입혀주었다.
“조용히 놀고, 옷 버리면 못 쓴다.”
“예.”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낚싯대를 가지고 나갔다. 우리 집 뒤를 돌아가면 갈밭이 있다. 가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수문을 잠그고 물고기를 잡고 있다. 물고기가 펄떡대고 있다. 나는 낚싯대를 버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물고기는 잡히지 않고 송사리만 대여섯 마리 잡았다.
갈대에다 송사리를 꿰어 집으로 향한다. 나는 어린 마음에 우쭐댄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있다.
“엄마! 나 고기 잡아왔다.”
어머니는 잠자코 뒷간으로 들어간다.
‘아, 큰일 났구나! 엄마가 뒷간에 드시면 반드시 회초리를 가지고 오신다.’
내가 대문밖에 서서 살그머니 보니 틀림없이 손에 회초리를 가지고 나온다. 나는 겁이 나서 그만 도망을 치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이 없는데 엄마는 왜 저렇게 화를 내시나…….’
--- p.12
우리 집은 남자 아이만 사는 곳이라 어머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큰형님은 어머니를 돕기 위해 석유깡통을 사와서 물동이를 만들었다. 세매(샘)가 멀어서 큰형님은 뒤에서 메고 작은형님은 앞에서 멘다. 나는 두레박을 가지고 그 뒤를 따른다. 그리하여 우리 집은 물 걱정은 없다.
그런데 큰형님과 작은형님은 종종 물동이를 메고 올 때 실랑이를 벌인다. 그 이유는 큰형님이 작은형님에게 “딱부리!” 하면, 작은형님은 큰형님더러 “촛대!”라 대꾸한다. 그리하여 작은형님은 앞으로 가지 않고 벋댄다. 큰형님은 민다. 마침내 작은형님은 메고 있던 물동이를 버리고 도망간다. 물동이에 구멍이 나고 물은 사방에 흘려진다.
“큰형님, 왜 작은형님을 자꾸 놀립니까”
“심심해서.”
큰형님은 웃고 만다.
--- p.15
세월은 참 잘 흘러간다. 벌써 내 나이 열네댓 살이 되었다.
공장에서 돌아오니 어머니가 순산하였다. 막냇동생 창제가 태어난 것이다. 나는 기쁨을 참지 못하였다. 계속 집에 있었던 동생 창민이에게 물었다.
“고추가”
“네, 형님. 고추입니다.”
“우리 집에는 남자만 여섯 명이다.”
“아니요, 일곱 명입니다.”
“아무리 내가 손을 꼽아 세어보아도 여섯 명이 틀림없다. 동생은 여동생 순이를 남자라고 아는 모양이다.”
“아니요, 아버지도 남자 아니요? 그러니 일곱 명이지요.”
“뭐라고? 네 말이 옳다. 맞다. 하하!”
동생 손을 잡고 둘이서 한참 웃고 있으니, 동생 창수가 고추를 내보
인다.
“나도 고추 있다.”
“오냐, 니 고추 참 맵다. 아기 고추하고 똑같다.”
어머니 말씀에 집안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 pp.37∼38
1945년 6월 그리운 내 고향 통영에 안착하였다. 집은 통영군 용남면 무전리에 있는 과수원이다. 어머니와 창수, 창제 두 동생들을 보니 참 반갑다. 집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고, 큰형님과 나, 두 동생들이 집 안팎을 대강 정리하였다. 안채, 아래채가 있고, 집 둘레가 참 넓다.
그 후 곧 8월 15일에 드디어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다.
나는 해방된 이날, 통영 시내를 둘러보았다.
“해방 만세!”
“우리 독립만세!”
여기저기 사람도 많고 기쁨의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나도 기쁨과 감격에 만세 부르며 시내로, 군청으로, 충렬사로, 세병관
으로, 사람 물결을 따라 온종일 돌아다녔다.
--- pp.93∼94
아침 해 뜰 무렵과 해 질 무렵에는 쌍방에 치열한 총소리다. 대포소리, 기관총소리, 박격포소리 등 큰 소란이다. 우리들은 방공호에 들어가 벌벌 떤다. 중대본부는 제1선, 대대본부는 제2선, 연대본부는 후방에 위치한다.
우리 중대는 제1선에서 매일 소대원을 전방과 교대시킨다. 큰 트럭으로 대원을 싣고 약 20~30리 간다. 적과는 약 1킬로미터 거리다. 내 눈에는 저 멀리 인민군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잘 보인다. 우리 중대에는 6개 소대가 있다. 인원은 280명 이상이다. 1개 소대에 보통 40~50명이다. 중대본부에는 의무대, 행정실, 보급실, 취사장이 있다. 매일 1~2명 정도 부상자가 생긴다. 매일같이 대포소리, 총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후방까지는 수백 리나 떨어져있다고 생각된다. 어찌하면 8개월을 무사히 근무하고 고향으로 가겠는가. 이대로 최전방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는, 부상당하는 것은 십중팔구이다. 입대한지 어느덧 1개월이 지났다.
--- pp.135∼136
하루는 고랑포와 고왕리, 두일리 근방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각 고지에는 인민군과 중공군이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산 밑이 온통 불바다다. 아군 헬리콥터가 여러 대 날아온다. 고지의 아군을 싣고, 탱크도 물고 날아갔다. 적군은 고지까지 올라가 점령하고 만다.
몇 시간 있으니 아군 폭격기 대여섯 대가 날아와서 고지를 폭격한다. 불바다다. 산이 까진다. 푸른 산이 몇 시간 후에 붉은 산이 되어버렸다. 시체는 산더미다.
각 고지는 이리하여 아군이 도로 점령하였다. 참 겁이 난다. 우리 부대는 총동원되어 영국부대를 따라다니면서 모든 것을 운반하여 준다. 부상자도 많이 생겼다. 여기저기 탄환이 날아와 박힌다. 우리 부대는 복귀하였다. 부상자도 많다.
--- pp.143∼144
황령산에 오른다. 먼발치 광안리를 내려다본다. 나는 한숨 쉬며 소일한다.
해가 바뀐다.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늘 자리를 지키며 매일같이 나를 맞는다. 산정(山情)은 이토록 무한한데, 인정(人情)은 왜 이리도 유한하단 말인가.
---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