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불순하지 않다
박수영은 눈이 빛나는 사람이다. 처음 만나든 여러 번을 만나든 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고, 그 눈이 맑고 투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미 『매혹』(2001)과 『도취』(2003) 등 두 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작가다. 알려져 있지 않은 만큼 적은 숫자일망정 열렬한 팬들이 있다. 소수 독자들의 손에만 머물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그녀의 소설은 사람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다. (중략) 박수영이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쓴 것은 그 행위의 본질상 80년대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80년대와 그 이후 전개된 시대적 현실에 대한 놀람과 비명, 그리고 기나긴 성찰의 산물이었다. 그녀가 2년 6개월간의 먼 ‘여행’에서 돌아와 발표한 이 책도 그의 글쓰기의 본질에 비추어보면 소설과 다름없다. 하지만 이 책은 일종의 여행기다. 아니, 여행기라기보다는 체류기다. 박수영은 자신이 경험한 것들, 만난 사람들, 생각한 것들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전달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담백하면서도 감성적인 스웨덴 체류기로 탄생했다.
스웨덴을 통해서, 스웨덴의 웁살라대학에서 포르투갈의 코임브라대학을 거쳐 다시 웁살라로, 스톡홀름으로 돌아가는 긴 시간 속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상에 관한 것이다. 변치 않는, 살아 숨 쉬는 이상. 미래를 향한,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꿈. 후회와 원망 없이 가볍게, 투명하게 우리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는 꿈.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그 다름을 향유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 우리 모두 다르지만 서로를 평등하게 대할 수 있으리라는 희구. 폭력 없는 세상. 약육강식 없는 질서. 박수영은 그런 이상에서 80년대에 유산된 꿈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다음 부분에서 나는 페이지를 두 번 접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어떤 사안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권위를 버리고 얼마든지 탄력적으로 대응한다. 세상에는 경찰과 국가 관리를 동원하며 으스대는 국가가 있고, 번쩍이는 경찰 배지를 과시하며 죄 없는 국민들도 ‘움찔’하게 만드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가능하면 허식과 권위를 버리고 헤게모니가 드러나지 않게 절제하는 국가도 있다. 스웨덴은 바로 가장 후자의 국가다. 국민을 겸허하게 대하는 나라.
이 책에서 스웨덴은 어떤 이상적인 국가 형태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다. 그곳에서 국가는 국민들과 체류하는 외국인들을 필요 없이 간섭하지 않는다. 국민은 국가라는 거대 기구에 주눅 들어 있지 않다. 지금 한국도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 박수영은 은연중에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과 스웨덴을 비교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문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의 보편적 기준을 고민해보기 위해서이다.
또 저자는 고착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동양인이라는 정체성, 여성이라는 정체성, 터키인이라는 정체성, 이슬람교도라는 정체성……. 그러나 이렇게 국적과 성별로 자기 삶의 기둥을 삼지 않는 길도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강하게 긍정하고, 삶의 진보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국적과 민족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종교가 다를지라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빵 같은 정체성을 뜯어먹으면서 불쾌한 표정을 짓는 데 익숙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 내게는 물론 고향이 있지만 타인에게도 저마다의 고향이 있으며, 그들의 고향이 곧 나의 고향이 될 수도 있다는, 근원적인 향수에 대한 의욕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음은 저자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빅토르 휴고의 이 말은 저자가 우리에게 건네고 싶은 말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이방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임을 자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타인과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오리엔탈리즘』을 쓴 에드워드 사이드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떠난 세상은 고독하지만은 않다. 이 책의 저자 박수영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말하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박수영은 이런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 그녀가 그곳에서 보고 듣고 겪은 많은 것들을 희생시켰다. 이 책에서 그녀는 한껏 절제하여 말한다. 그곳에서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그리움을 지그시 누르고, 소설가로서 자신의 분방한 관심들을 세심하게 조율한 뒤 우리들의 삶과 세계에 대해, 한국인과 스웨덴 사람들과 터키 사람과 폴란드 사람과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린네의 식물 채집에 관해 이야기하고, 동양과 서양에 관해 이야기한다. (중략) 이 책에서 그녀는 맑고 섬세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제안한다. 우리 모두 이방인이 되자고, 딱딱한 거북이의 등껍질을 벗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피부로 숨 쉬는 사람이 되자고. 그 목소리는 마치 그녀의 맑은 눈빛 같기도 하다. 어떤 안쓰러운 마음에 시달리며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생각한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라흐마니노프를 듣는 사람은, 불순하지 않다.
방민호(문학평론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 책의 미덕은 스웨덴이라는 나라를 매혹시킨 힘이다. 또 다른 미덕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오랜 지적 훈련으로 단련된 작가의 격조 높은 시선과 성찰에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광분했으며, 웁살라에서 보낸 작가의 캠퍼스생활을 선망했으며, 작가의 첫 장편소설 『매혹』이라는 이름은 이 책에 붙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갑수(문화 평론가, 시인)
“직업상 수십 차례 유럽을 여행했어도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았던 북유럽 사회를 이 책으로 인해 비로소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서가 아닌 한 사회에 대한 섬세하고 지적인 소묘다. 이 책의 진가는 지성적인 독자들에게 달려 있다. 이 책은 특히 ‘미국화’되어 있는 한국의 대학 교수들이 읽어야 하며, 학생들에게도 적극 추천한다.”
오동훈(서울시립대학 도시행정학 교수)
“모처럼 ‘지적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작가의 스웨덴에서의 유학기이지만 단순한 경험의 서술이라기보다 같이 공부했던 다른 나라 친구들을 통해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의 근원을 되짚어가는 여행이며, 같은 사안을 다른 나라 친구들은 어떻게 다르게 인식하고 행동하는지를 작가의 철학적, 역사적 시각으로 흥미롭게 풀어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말러’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도 새삼 듣고 싶어지게 될 것이다.”
이정애(SBS 기자)
박수영은 눈이 빛나는 사람이다. 처음 만나든 여러 번을 만나든 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고, 그 눈이 맑고 투명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미 『매혹』(2001)과 『도취』(2003) 등 두 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작가다. 알려져 있지 않은 만큼 적은 숫자일망정 열렬한 팬들이 있다. 소수 독자들의 손에만 머물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그녀의 소설은 사람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다. (중략) 박수영이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쓴 것은 그 행위의 본질상 80년대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80년대와 그 이후 전개된 시대적 현실에 대한 놀람과 비명, 그리고 기나긴 성찰의 산물이었다. 그녀가 2년 6개월간의 먼 ‘여행’에서 돌아와 발표한 이 책도 그의 글쓰기의 본질에 비추어보면 소설과 다름없다. 하지만 이 책은 일종의 여행기다. 아니, 여행기라기보다는 체류기다. 박수영은 자신이 경험한 것들, 만난 사람들, 생각한 것들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전달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담백하면서도 감성적인 스웨덴 체류기로 탄생했다.
스웨덴을 통해서, 스웨덴의 웁살라대학에서 포르투갈의 코임브라대학을 거쳐 다시 웁살라로, 스톡홀름으로 돌아가는 긴 시간 속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상에 관한 것이다. 변치 않는, 살아 숨 쉬는 이상. 미래를 향한,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꿈. 후회와 원망 없이 가볍게, 투명하게 우리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는 꿈.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그 다름을 향유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 우리 모두 다르지만 서로를 평등하게 대할 수 있으리라는 희구. 폭력 없는 세상. 약육강식 없는 질서. 박수영은 그런 이상에서 80년대에 유산된 꿈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다음 부분에서 나는 페이지를 두 번 접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어떤 사안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권위를 버리고 얼마든지 탄력적으로 대응한다. 세상에는 경찰과 국가 관리를 동원하며 으스대는 국가가 있고, 번쩍이는 경찰 배지를 과시하며 죄 없는 국민들도 ‘움찔’하게 만드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가능하면 허식과 권위를 버리고 헤게모니가 드러나지 않게 절제하는 국가도 있다. 스웨덴은 바로 가장 후자의 국가다. 국민을 겸허하게 대하는 나라.
이 책에서 스웨덴은 어떤 이상적인 국가 형태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다. 그곳에서 국가는 국민들과 체류하는 외국인들을 필요 없이 간섭하지 않는다. 국민은 국가라는 거대 기구에 주눅 들어 있지 않다. 지금 한국도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 박수영은 은연중에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과 스웨덴을 비교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문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의 보편적 기준을 고민해보기 위해서이다.
또 저자는 고착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동양인이라는 정체성, 여성이라는 정체성, 터키인이라는 정체성, 이슬람교도라는 정체성……. 그러나 이렇게 국적과 성별로 자기 삶의 기둥을 삼지 않는 길도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강하게 긍정하고, 삶의 진보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국적과 민족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종교가 다를지라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빵 같은 정체성을 뜯어먹으면서 불쾌한 표정을 짓는 데 익숙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 내게는 물론 고향이 있지만 타인에게도 저마다의 고향이 있으며, 그들의 고향이 곧 나의 고향이 될 수도 있다는, 근원적인 향수에 대한 의욕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음은 저자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빅토르 휴고의 이 말은 저자가 우리에게 건네고 싶은 말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이방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임을 자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타인과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오리엔탈리즘』을 쓴 에드워드 사이드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떠난 세상은 고독하지만은 않다. 이 책의 저자 박수영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말하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박수영은 이런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 그녀가 그곳에서 보고 듣고 겪은 많은 것들을 희생시켰다. 이 책에서 그녀는 한껏 절제하여 말한다. 그곳에서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그리움을 지그시 누르고, 소설가로서 자신의 분방한 관심들을 세심하게 조율한 뒤 우리들의 삶과 세계에 대해, 한국인과 스웨덴 사람들과 터키 사람과 폴란드 사람과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린네의 식물 채집에 관해 이야기하고, 동양과 서양에 관해 이야기한다. (중략) 이 책에서 그녀는 맑고 섬세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제안한다. 우리 모두 이방인이 되자고, 딱딱한 거북이의 등껍질을 벗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피부로 숨 쉬는 사람이 되자고. 그 목소리는 마치 그녀의 맑은 눈빛 같기도 하다. 어떤 안쓰러운 마음에 시달리며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생각한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라흐마니노프를 듣는 사람은, 불순하지 않다.
방민호(문학평론가?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