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는 전 세계에 걸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두 단어로 규정된다. ‘산업화’와 ‘제국주의’가 그것이다. (중략) 청에 종속돼 있던 조선은 여전히 청에 대한 사대주의로 일관하며 나라 바깥의 사정에 무지한 채 국가 존망의 기로가 닥쳐오는 데도 내분만 일삼고 있었다. 일본은 19세기 중엽 미국에 개항 당한 후 짧게 혼란기를 거치며 빠른 속도로 산업화에 편승했다.
일본의 개항 이후 비슷한 상태에 있던 조선과 일본 양국은 불과 20년 만에 현격한 국력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 20년 동안 조선과 일본 두 나라에는 어떤 정치가 있었을까? 그 차이는 고종과 메이지 천황의 리더십 그리고 한일 양국의 국민성 차이에서 비롯됐을 것이 자명하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인 1894년 3월 동서양 각국의 정보 수집과 막후협상이 비밀리에 이루어지던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우리 역사의 한 시기를 일단락 짓는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상하이의 미국 조계에 있던 한 여관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 것이다.
1894년 3월 28일,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상하이 동화양행 여관에서 자객 홍종우가 쏜 세 발의 총을 맞고 절명한 사건이다. 그 총성은 개혁을 이루려 했던 한 풍운아의 종말뿐 아니라 조선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 본문 중에서
19세기 한국과 일본의 정치 차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본 정치인들이 국익國益을 도모한 반면, 조선 위정자들은 사익私益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국익 도모는 노선이 다르더라도 서로 손을 잡을 여지를 남기지만, 사익 추구는 개인적 이해관계가 작용해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든다.
이 차이가 한쪽은 부국강병에 이르게 하고, 다른 쪽은 멸망으로 내몰았다.
19세기 말 조선이 경험한 시간은 안개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바깥 세계의 사정에 대한 정보도, 이해도 모두 부족했다. 아무도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우물 안 개구리 신세였던 그때의 정치인들은 국가의 운명은 외면한 채 오직 권력 쟁탈에만 집중했다. 엉망인 내부를 개혁하지 않은 채 외세를 마구 끌어들여 멸망을 자초했다.
(중략)
정저지와(井底之蛙),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수무책(束手無策), 고립무원(孤立無援), 설상가상(雪上加霜)… 19세기 말 조선의 상황을 대변하던 표현들이어서 백 년 전과 지금이 놀랍도록 닮은 상황이라는 사실에 전율한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바깥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차고 넘치지만, 여전히 한국호의 조타를 맡아 격랑을 피하고 헤쳐나가야 할 정치가 그때와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게 문제이다. 한국 정치는 여전히 급변하는 외부 흐름을 무시한 채 안의 논리에만 집착하려 든다. 막을 수 있는 위기를 경시하다 막상 눈앞에 닥치면 감당을 못해 대국에 중재를 부탁하고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치의 힘으로 위기를 예방하고, 국난을 맞더라도 내부를 단결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해 대처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자세가 선행돼야 한다.
(중략)
지금 국민은 19세기 말 조선 백성들과 다르다. 그때는 신민臣民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시민市民의 위치에 있다.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안다. 정치는 국민을 다루거나 그 위에 군림하려 들지 말고 솔직하게 다가가야 한다. 19세기 말 조선은 국왕을 위시한 권력층이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국가와 국민을 뒷전에 두면서 망국을 초래했다. 미사여구가 아니라 믿음이 가는 정책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최선의 정치라는 게 조선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국민이 지지하는 정부는 외세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법인 까닭이다.
--- 본문 중에서
한국인은 수 세기 동안 조선의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해왔지만, 나라가 주권을 잃는 과정에서 그것을 막기 위한 조직적인 저항은 없었다. 나라를 걱정하는 엘리트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욕을 채우려는 모리배들만 남은 상태였다.
나라가 병탄을 당한 국치의 날에도 장안(長安, 서울)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번화가인 종로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왕조가 바뀐 것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 듯 보였다. (매일신보)
멀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아관파천의 주역이던 이범진 주러시아 공사가 망국에 절망해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범진은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정부를 구성했을 때 리더로서 영국과 독일법에 기초한 정부조직 개편과 독일 육군, 영국 해군, 러시아 기병, 일본 경찰 그리고 미국의 산업을 도입하려는 개혁을 펴려다 영국과 일본을 자극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그 결과는 조선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불운한 엘리트였다.
전남 구례에 칩거하던 매천 황현도, “내가 꼭 죽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지식인 하나쯤은 죽어야 한다.”라며 음독자살했다. 결론적으로 고종은 대내 개혁과 대외 개방을 시도하고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자주국의 면모를 갖추려 애썼으나 메이지 천황과 비교해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빨리 인식하지 못한 데다 지도층의 권력 사유화를 막지 못한 탓에 국민의 지지에 바탕해야 하는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지배층은 서로 자기 생각이 옳다며 수구파와 친일 개화파, 친러 개화파 등으로 사분오열했다.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 무능한 리더십이 분열의 원인이었다. 개혁과 개방을 추구하는 급진적 진보 세력과 이를 공론의 장에서 비판하는 성리학적 보수 세력이 백척간두에서 격렬한 대립 양상을 보였다. 국민은 두 주장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할 따름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