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등에 지고 있는 부처가 광덕산에 이르니, 어디선가부터 깃털같이 가뿐했습니다. 얼마쯤을 왔을까. 그렇게 가볍게 느껴지던 부처가 갑자기 똥 못 싸고 죽은 놈처럼 무거워서, 발길을 옮겨놓을 수가 없었어요. 어부는 부처님을 업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지요. 이곳이 부처님을 모실 곳인가 보다 생각하고, 그곳에 돌부처를 모셔놓고 바라보니 저 아래 산자락 사이로 보이는 바다 한 자락이 옥 빛깔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어부는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어부에게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부처님을 모시자면 당연히 법당이 있어야 하는데 난감했어요. 나이는 먹었고 거기다가 홀몸인지라 어떻게 불사를 할 도리가 없었던 거지요. 자기도 모르게 아미타불을 찾으며 관세음보살을 외웠지요. 그날 밤 어부는 꿈에서 부처님을 만났어요.
“걱정하지 말거라. 바닷가에 나가보면 난파된 배가 있을 것이니, 그 재목을 써서 건물을 짓도록 하고, 또한 바닷가에는 검은 소 몇 마리가 있을 테니 그들을 끌어다가 법당을 짓도록 하여라.”
잠시 동안의 일이었지만, 그 모습은 생생하게 머릿속에 새겨졌지요. 어부는 날이 밝자마자 바닷가로 달려갔어요. 모래사장에 난파된 배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멀리 검은 소 세 마리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게 아녜요?
어부는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꿇어 엎드려 절을 올리고, 그 재목을 가져다가 불사를 하고, 바다에서 건진 부처님을 모셨다고 합니다. 그 절이 지금의 심복사라고 해요. 가난한 이의 불사라 큰 복을 받아 잘살라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붙였겠지요.
--- p.70~71
무슨 번뇌가 그리 깊으냐? 주지 스님이 절 마당의 어린 보리수 묘목에 물을 주다가 물었다. 석지심은 자기가 당나라까지 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스님의 사랑을 입어 3년이나 공덕을 쌓았는데 눈앞이 자꾸만 흐려져 정진이 되질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일은 네가 몸으로 부닥쳐보아야 풀릴지 모른다. 그러니 길을 떠나도록 하라.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 네 눈으로 보고 그게 짐승 짓인지 사람 노릇인지 확인해야 할 게야. 주지 스님은 조리를 땅바닥에 놔두고 허적허적 걸어서 대웅전 뒤로 돌아갔다. 아마 심우도를 쳐다보며 염불을 할 것 같았다.
--- p.105~106
삶을 누리자면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은 되물을 일이 아니었다. 죽음을 명상하재도 살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삶은 명령이었다. 구태여 하늘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부름이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석지심이 찾아 나선 구도의 길이라는 것이 누이를 다시 만나 짐승의 무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면, 삶의 가치 그 절대성에 비하면 목표 자체를 잘못 설정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장숙 자신은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피를 가리는 것은 피를 죄의 빛깔로 짙게 할 뿐일 터였다.
달리 생각하면 삶이라는 게 그리움의 근원을 찾아 떠도는 여행 같기도 했다. 그 그리움 속에는 안타까움과 비애, 원망, 자기 혐오, 그런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장숙은 자신이 지니고 사는 근원적인 그리움이 무엇인가 머리를 짚고 생각했다. 그런 그리움이 없어서 헤매도는 길 위의 시간에 흔들리는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진정한 애정의 결핍일지도 몰랐다. 툭툭 치고 달려들기는 했지만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 못했다. 누구를 대신해서 자기 목숨 내놓겠다는 다짐도 없었다. 자기 사는 거야 어떻게 되겠지, 안이한 생각으로 어정어정 시간을 보냈다. 앞가슴으로 서늘한 바람이 몰려들었다.
--- p.133~134
밀린다 왕의 호기심은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밀린다 왕은 불교에서 일체무상, 일체무아, 일체개고라 하는데, 무아론을 주장한다면, 왜 자신의 몸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몸에 집착해서 불법을 거스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몸을 버려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현자에게 물었다.
“나가세나 비구여, 출가자에게 몸은 사랑스러운 것입니까?”
“대왕이여, 출가자에게 몸은 사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몸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아끼는 것일까요?”
“대왕이여, 언젠가 전쟁터에 나섰다가 화살을 맞은 일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당신은 그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고 해서 그 상처가 당신에게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가세나 비구여, 상처는 사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상처가 악화될 것이 두려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을 뿐입니다.”
“대왕이여, 그것과 마찬가지로 출가자에게 몸은 사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출가자는 몸에 집착하지는 않지만 다만 수행을 위해 몸을 보호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참으로 세존께서는 ‘몸은 상처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출가자는 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마치 상처처럼 보호하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이를 게송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축축한 피부로 덮여 있는 아홉 개의 구멍을 가진 상처이니라. 부정하고 악취가 나는 것이 도처에서 흘러나온다.’”
“나가세나 비구여, 정말로 옳은 말씀입니다.”
--- p.162~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