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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그림자 되어

그대 그림자 되어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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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9월 11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28쪽 | 554g | 135*195*25mm
ISBN13 9791186644928
ISBN10 118664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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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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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채만 한 무게를 이마 끈으로 버틴 포터가 문 없는 설주를 돌아선다. 거대한 짐에 눌린 등이 구부정하게 굽는다. 포터를 덮은 망태기가 허공을 가른다. 삼박사일을 견딜 식량과 텐트, 포터가 쓸 물건, 다섯의 배낭을 담은 짐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맨 몸으로 걷기조차 벅찬 고소다. 돈을 받는 일이라지만 집채만 한 짐을 걸머지고 산길을 걷는 그들이 초인처럼 비친다. 서둘지 않는 그들 뒤를 맨몸인 나그네가 허둥거리며 좇는다. 는개처럼 어린 황사가 눈코 입을 덮친다. 해발 4천에 밴 기압이 존재를 으른다. 얼굴을 때리는 마파람 탓에 눈을 뜰 수 없다. 입으로 날아든 모래가 서걱거린다. 율이 고개를 깊이 묻는다. 앞뒤 옆을 살필 겨를이 없다. 지금 떼는 걸음에 사력을 다한다.

갈 곳 없는 백수에게 종잡을 수 없는 사내가 알 수 없는 나라를 들이대었다. 율과 동떨어진 티베트가 영혼 없이 떠돌았다. 치언의 눈이 빛을 쏘는 티브이 화면에 닿아 있었다. 율이 함께 시선을 꽂았다. 노란 유채꽃 덮인 들판 뒤에 세모꼴로 선 한라산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율이 귀에 선 낯선 땅을 들으며 아직 못 가본 섬을 바라보았다. 제주도든 티베트든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원시 또는 시원에 닿은 땅을 들으며 어릴 적 오가던 산길을 그리기는 했다. 조각난 기억 틈새로 살아야 할 날과 날마다 드는 비용, 등이 휘도록 일해야 할 하루가 희뜩거렸다. 일자리를 찾아야 할 텐데, 엎어진 김에 쉬어가지. 두 문장이 엇갈렸다.

얽힌 난마가 실마리를 풀었다. 함축된 뜻이 결대로 풀렸다. 붕괴. 생각 못한 단어가 튀어들었다. 밖이 아닌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괴멸이 잇따랐다. 보이지 않는 실금이 빌미가 되어서 망가진다. 몸과 마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낱개로 떠돌던 검부러기가 모이더니 하나의 꼴을 이루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줄을 그었다. 씨앗을 뚫은 새싹의 힘이 퍼졌다.

손으로 마니차를 돌리며 걷는 행인이 점점 늘었다. 흐르는 인파가 물처럼 스쳤다. 길가에 놓인 드럼통만한 것부터 손에 든 작은 것까지. 크고 작은 둥근 통이 제마다 동그라미를 그렸다. 허공을 가르는 둥근 원이 바람을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커다란 고리가 우주와 세상과 율을 둘렀다. 몸과 마음은 물론 눈과 귀까지 어릿거렸다. 저도 모를 딴 세상으로 들어왔다.

지레 짐작으로 빚은 확신이 착각을 일으켰을까. 제대로 본 건지 헛것에 홀렸는지 분명치 않았다. 근거 없는 추측에 기대어 광대놀음을 했다. 의심 섞인 회의가 소용돌이쳤다. 후회하며 미적거리는, 어리석은 허울을 언제면 벗을까. 뒷북이나 치는 겁쟁이를 벗어날 수 있을까. 눌려 산 탓에 머뭇거리는지 태생 전에 이미 정해졌는지. 일마다 모호했다. 어릴 적 시도 때도 없이 도지던 까탈과 그때마다 쏟아지던 지청구가 귀를 울렸다.

율이 따라서 기지개를 켰다. 갇혔던 숨이 시원하게 날았다. 눌렸던 뼈마디가 결대로 풀렸다. 위풍당당한 강풍이 모두를 쓸어낼 듯 앙칼지게 날을 치켰다. 허공을 채운 오색 깃발이 숨찬 비명을 질렀다. 치언이 손을 들어 가리켰다. 흩어졌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다들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먼 땅 끝에 사마귀처럼 돋은 바위산이 부연 연무에 잠겨 있었다. 치언이 눈을 떼지 않고 외쳤다.
카일라스다!

라사에 묵었던 첫날, 지독한 안개 속을 걷던 꿈을 꾸었다. 잠을 깨어서도 멍했던 그 새벽의 정한이 도졌다. 못 잊을 어미와 은수미가 시린 바람에 실려왔다. 절정의 노랑이파리가 한꺼번에 날렸다. 천만 송이 꽃잎이 눈처럼 날려요. 여자의 음성이 바람에 실렸다. 살이 오그라드는 말조차 은수미의 입을 통하면 달리 들렸다. 수면을 친 새가 끽 끽 울음소리를 내며 빠르게 솟구쳤다. 만년의 세월을 묻힌 바람이 괴이쩍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우주의 숨소리가 깊이 스몄다.

누더기가 되어서 땅과 하나 된 오체투지에 이어 집채 같은 무게를 머리끈 하나로 버틴 포터가 어린다. 희박한 산소와 척박한 조건을 말없이 받아들인 그들이 순한 눈을 든다. 맞닥뜨린 불공평조차 하늘의 뜻으로 안다. 희뜩 어지럽다. 율이 풀린 다리를 애써 버틴다. 하늘땅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건 꿈일까 또 다른 착각일까. 벌거벗고 설산을 기는 그림자가 잇따른다. 못 박은 채찍으로 알몸을 후려치는 모습도 있다. 극한의 고통을 지나 경계 너머의 환희를 바라는 몸짓이 곳곳을 누빈다. 이생의 욕망이 아닌 남다른 방법으로 평화를 구하고 있다.

타르초의 바다를 가르던 치언이 곧 사라진다. 바닥난 힘이 마저 사윈다. 하늘땅 아래 홀로 남아 있다. 누가 무엇을 하든, 어찌되든 상관없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받아들일 것이다. 안을 끓이던 불덩어리와 가슴에 괴었던 냇내, 육신을 찢던 갈망이 잦아든다. 기억으로 지은 헛것들이 뒷걸음질 친다. 어른거리는 신기루에다 잠깐의 소망을 걸었다. 지금 남은 건 목을 오르내리는 숨뿐이다. 지일이 묵직하게 지켜보고 있다.

제석천이 빚은 환영일까. 한꺼번에 날아든 수만의 나비가 날개를 파닥인다. 비산하는 노랑이 하늘땅을 덮는다. 겁에 닿은 시간이 긴 자락을 편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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