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로에게는 파트라슈만 아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오두막에는 넬로 말고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작은 헛간이 있었다. 황량하지만 북쪽에 난 창으로 빛이 잘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넬로는 거친 판재로 서투르나마 이젤을 만들었고, 머릿속에 든 수많은 공상 중 하나를 종이라는 광활한 잿빛 바다 위에 펼쳐 놓았다. 누구한테 그림을 배운 적도 없었고, 물감을 살 돈도 없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조잡한 미술 도구도 끼니를 숱하게 거르며 겨우 마련한 처지였다. 그나마도 검정색이나 흰색으로밖에 표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넬로가 이곳에서 석필로 그린 훌륭한 그림은 쓰러진 나무에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나무꾼인 미셸 할아버지가 저녁에 그렇게 앉아 있는 모습을 많이 보았던 것이다. 선이나 원근법, 해부학, 명암에 대해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넬로는 약하고 지친 사람들과 슬픔을 조용히 감내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서글픈 마음을 투영했다. 그렇기에 죽은 나무 위에 앉아 홀로 명상에 잠긴 그 외로운 노인의 모습은 저물어 가는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한 편의 시가 되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투박하고 흠도 많은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웠고, 예술적이고 애잔하기 그지없었으며 아름답기도 했다. ---pp.78-80
한편 넬로는 불평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비겁한 태도라는 생각에 당당한 인내심으로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참아냈다. 다만 늙은 파트라슈와 단둘이 있을 때에만 속내를 살짝 내보였다. 또 이런 생각도 했다.
‘내 그림이 상을 받는다면! 그땐 아마 사람들도 나한테 미안해할 거야.’
하지만 아직 열여섯 살이 안 된, 짧은 생애 동안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칭찬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에게 그 작은 세계 전체가 등을 돌리고 무너지는 일은 혹독한 시련이었다. 눈에 갇히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추운 겨울은 특히 힘들었다. 난로 옆이나 이웃들의 다정한 인사 속에서만 빛과 온기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자 넬로와 파트라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더욱 가깝게 지냈다. 이제는 아무도 둘을 상대하지 않았고 넬로와 파트라슈만이 작은 오두막에서 거동도 못하고 몸져누운 할아버지를 돌보아야만 했다. 장작불은 자주 사그라졌고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았다. 어느 날 안트베르펜에서 새로운 상인이 노새를 끌고 와 여러 농가의 우유를 거두어 갔고, 단지 서너 집만이 그가 내건 판매 조건을 거절하고 작은 초록색 수레와의 신의를 지켰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파트라슈가 끄는 짐은 아주 가벼워졌고, 슬프지만 넬로의 주머니 속에 들어오는 돈도 줄어들고 말았다.
파트라슈는 평소처럼 낯익은 대문 앞에 멈춰서도 문이 열리지 않자 간절한 눈길로 묵묵히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이웃들 역시 문도, 마음도 모두 닫은 채 파트라슈가 빈 수레를 끌고 가게 하자니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도 코제 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했다. ---pp.94-95
‘넬로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걸 찾아간 거구나.’
파트라슈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파트라슈에게 예술에 대한 넬로의 열정은 이해하기 어렵고 신성하기까지 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슬픔과 안쓰러움으로 가득 찼다.
성당 문은 자정 미사가 끝난 후 열린 채였다. 관리인들이 집에 가서 잔치를 즐기거나 자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아니면 열쇠를 제대로 돌렸는지도 모를 정도로 너무 졸린 탓에 여러 문 중 하나를 부주의하게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파트라슈가 찾던 발자국은 성당 안으로 이어졌고 검은 돌바닥 위에 하얀 눈 자국을 남겼다. 파트라슈는 눈이 떨어져 하얀 실처럼 얼어붙은 흔적을 따라 둥근 천장으로 덮인 거대하고도 지극히 고요한 공간을 지났고 성단소로 곧장 나아갔다. 그리고 돌바닥 위에 쓰러져 있는 넬로를 발견했다. 파트라슈가 살며시 다가가 넬로의 얼굴을 건드렸다.
‘내가 의리 없이 널 버릴 거라고 생각했니? 내가 개라서?’
파트라슈는 꼭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넬로가 낮게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더니 파트라슈를 꼭 끌어안았다.
“여기 누워서 함께 죽자.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필요 없어. 우리는 외톨이야.”
넬로가 울먹거렸다. ---pp.116-118
갑자기 눈부시게 하얀 빛이 어둠을 뚫고 넓은 복도를 지나 흘러 들어왔다. 꽉 찬 보름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것이었다. 눈은 이미 그쳤고 눈에 반사된 달빛은 새벽빛만큼이나 선명했다. 달빛은 둥근 천장을 통과해 루벤스의 두 그림을 환하게 비추었다. 넬로가 성당에 들어왔을 때 그림을 덮고 있던 가리개 천을 걷어 버렸던 것이다.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가 한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넬로가 일어서더니 그림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기쁨에 찬 눈물이 반짝거렸다.
“드디어 그림을 봤어! 오, 하느님, 이제 됐습니다!”
넬로가 크게 외쳤다. 팔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긴 했지만 눈은 여전히 숭배하던 걸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나마 빛은 넬로가 그토록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신성한 그림들을 비춰 주었다. 신의 권좌에서 흘러나온 듯 선명하고 감미로우면서 강렬한 빛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짙은 어둠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넬로가 파트라슈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거기 가면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어. 그분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을 거야.”
---pp.12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