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 회장(1910.2.12 경남 의령~1987.11.19; 개띠;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 전문부 중퇴)은 세상을 떠나기 전 서울 절두산성당의 박희봉 신부(1924∼1988; 쥐띠)에게 24가지 항목을 담은 질문서를 보냈다.
이병철 회장의 구술을 비서가 받아 적은 질문서는 박희봉 신부를 거쳐 당시 가톨릭대 교수이던 정의채 몬시뇰 신부(1925.12.27 생; 소띠)에게 넘겨졌다. 하나, 이병철 회장은 정 몬시뇰과 만나기로 약속이 잡힌 상태에서 갑자기 별세하고 말았다.
이후 이병철 회장의 질문서는 여기저기로 떠돌게 되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발동한 몇몇은 실제로 두서없는 답변을 달아 저승을 향해 주소불명, 수취인불명의 종이비행기를 날리곤 했다.
모두가 제 손거울로 바라본 것들이고 조각 거울로 들여다본 어설픈 것들이었다. 누구도 전신거울로 보거나 아니면 저승 입구의 명경(明鏡)을 통해 바라보지 못했다.
다들 그저 제 소견머리, 제 마음씀씀이, 제 상상력, 제 명예욕 정도에 얽매여 이승의 뻔한 길잡이에도 턱 없이 부족한 희미한 불빛만 비췄을 뿐이다.
타계 한 달 전에 시들어가는 몸과 넋을 쥐어짜며 던진 24가지 질문이 어떻게 내로라하는 말꾼들, 재주꾼들, 입방아꾼들, 뒷담화꾼들을 위한 것이었겠는가? 사실은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이었다.
사실은 길게 보면 다들 임종의 시각을 향해 줄달음하는 것이기에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너무 서글픈 나머지, 너무 두려운 나머지 ― 가장 귀한 선물을 준답시고 24가지 질문을 우리 모두 앞에 덩그러니 내던져 놓고 떠났을 것이다. 굳이 답변을 알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우리 모두에게 ‘알 걸 알고자 해야 참 사람이다.’라는 귀띔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 세상 잘 살았다면 최소한 24가지 질문 속의 몇 문항 정도는 웬만큼 꿰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빈 종이만 들고 낯익은 이승에서 낯선 저승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서둘러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는 경고와 당부와 훈계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른다.’고 먼저 말하는 쪽이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까막눈이라서 모른다.’고 말하면 그나마 뭔가가 비집고 들어갈 틈바구니라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섣불리 ‘안다.’고 말하면 그 즉시 빠끔히 열렸던 문마저 완전히 닫힌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안다. 약간 안다.’는 식으로 토를 달며 얼버무리면 저도 빠져 죽고 남도 빠져 죽게 하는 엉터리 헤엄치기가 된다고 했다.
‘땅의 것, 사람에 대한 것, 먹고 사는 문제도 제대로 모르는 판에 어떻게 허공을 알고 우주를 알고 신을 아느냐?’는 것은 공자가 한 말이다.
‘그렇고 그런 어중이떠중이 셋이 걸어가도 그 속에 앞선 이도 있고 뒤쳐진 이도 있기 마련인데, 하물며 어떻게 귀신과 걷고, 신과 걷고, 유령, 정령, 신선, 신령 등과 함께 노닐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저 사람 사는 이치, 사람 사는 도리에나 틈틈이 관심을 두라고 했다. 다른 맛은 다 집어치우고 그저 밥맛, 입맛만 알아도 되고, 윗도리, 아랫도리만 가릴 줄 알아도 되고, 푹신한 이부자리만 곧잘 찾아내도 된다고 했다.
부처는 ‘알고자 하면 모르게 되니 아예 처음부터 알고자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데, 무엇을 묻고 답하느냐?’고 했다. 그 ‘알고자 하는 욕구’마저 족쇄가 분명하고 수렁으로 잡아끄는 못된 손길이 틀림없으니, 차라리 ‘알고자 하는 대상’은 물론이고 ‘알고자 하는 자아 자체’를 무시하라고 했다.
공중을 나는 것들이 언제 제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검불을 찾느냐고 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자 한다면 그 어느 것에도 일체 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결국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다음에나 물을 수 있고, 알 수 있고, 답할 수 있다.’고 했다.
예수는 ‘모든 것의 근원은 창조주 한 분이니 사람의 잣대, 세상의 잣대 모두 버리고 그저 창조주의 잣대 하나에 매달려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창조주 곁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고 같이 지켜본 유일한 주체이고 창조주에 버금가는 주인이니, 하늘에 대한 것, 창조주에 대한 이야기 등은 오로지 내게만 물으면 되고 내게서만 들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창조주, 구세주의 제일 법칙은 바로 사랑이니, 사랑만 알면 곧바로 창조주로 통하는 길, 구세주로 통하는 길을 찾을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고 빛’이라고 선포했다.
모두가 사실은 ‘삶의 질 높이기’의 열쇠에 대한 담론인 셈이다. 주위의 그 많은 것들 중 무엇을 가리키며 누구를 가르치든 핵심은 모두 ‘사람 값 끌어올리기, 사람의 진짜 주인 찾아주기, 사람의 진짜 삶 가르쳐주기’의 하나였다.
그래서 이병철 회장이 임종 직전에 남긴 질문지는 개나 걸이나 함부로 달려들어 물어뜯고 베어 먹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가 눈 앞에 걸어놓고 시시때때로 들여다보고 읊조리고 갸우뚱거리고 끄덕거려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실제 글이나 말로 옮긴 대답보다도, 각자의 속에 든 것들, 마음밭에 떨어진 것들, 가슴에 새겨진 것들, 머릿속을 맴도는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입 밖에 튀어나온 것은 겨우 0.001%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몽땅 입 속에, 뱃속에, 가슴 속에, 머릿속에, 핏속에, 뼛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임종을 아주 가까이 두고 있던 한 노인의 궁금증’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인정하든 안 하든 우리 모두는 임종을 앞두고 있다.
그 임종의 시각과 어느 정도로 멀고 가까우냐만 다를 뿐, 너나없이 임종의 시각에 맞춰진 채 더듬거리고 있고 헤매고 있고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병철 회장처럼 ‘임종이 바로 코앞이다.’라고 여기고 24가지 질문지를 꼼꼼히 다시 들여다보면 의외로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그 뻔한 질문에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느냐?’고 퉁명스럽게 내뱉을 것이다. 혹자는 ‘그걸 다 알면 신이지 사람이냐?’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혹자는 ‘이현령비현령식의 답만 있을 텐데 누가 감히 그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하나로 뭉뚱그려 놓겠느냐? 그저 섣부른 답변만 넘쳐나게 될 것이다. 차라리 그 질문지 자체를 가장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고 다들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라며 아예 ‘좋은 질문은 그 자체가 곧 답안’이라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남는 것은 ‘만일 임종이 바로 코앞이라면 다만 몇 가지라도 꼭 알아두고 끝내야 하지 않을까? 중요한 질문이고 근본적인 질문이라면서 단 한 문항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 한다면 그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헛산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라도 핵심적인 여남은 문항들은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라도 대충대충 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부호다.
왜냐하면, 각자의 임종은 각자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경고이고 신호이고 독촉이기 때문이다.
굳이 신이니 영혼이니 내세니 하는 자못 ‘거창한’ 것들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사람이면 당연히 묻고 답해야 하는 것들’에 국한해서라도 뭔가 좀 색다른 꼬리를 잇고 눈에 확 띄는 밑줄을 그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몇 가지 고민을 함께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임종을 코앞에 둔 사람’으로 돌아가 모처럼 머리를 쥐어짜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최선을 다해 답안지를 채워보기로 했다.
뭐든 움직이고 변하듯이, 생각마저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갖 재주를 피우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질문지 자체는 한 세대 이전에 고정되어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 당대인의 답안지만이라도 채워놓자고 다짐했다.
누구나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임종을 향해 성큼성큼, 뚜벅뚜벅 걷게 되면 24가지 질문 중 다만 몇 가지라도 최선을 다해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임종이라는 말 자체가 그런 명령형이다.
임종이라는 시각 자체가 그런 명령부호다.
생로병사의 완결판인 임종 앞에서조차 등신, 멍청이로 머문다면 어느 귀신이 달가워하고 어떤 허공이 덥석 끌어안겠는가?
다시 한 번, 고(故) 이병철 회장의 영전에 고마운 마음을 바친다.
그래도 24가지로 잘 압축된 질문지 덕분에 다들 알게 모르게 철이 좀 들게 되고, 눈을 좀 뜨게 되고, 넋의 무게, 삶의 빛깔, 숨결의 힘줄이 조금씩 달라졌을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선물, 더 큰 기여, 더 큰 희생이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머리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