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대학교 종합문화연구과 비교문학 비교문화 연구과정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시마자키 도손의 문학세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덕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장, 박물관장을 거쳐 현재 동대학 일본어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아버지란 무엇인가』 『시마자키 도손』 『명문으로 읽는 일본문학 일본문화』 등이 있고, 시마자키 도손의 『봄』을 비롯하여 『소설의 방법』 『마테오 리치』 『잿빛 달』 『일본기독교문학선』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아버지는 또 덧붙여서, 세상에 나가 출세하려는 백정 자식의 비결―유일한 희망, 유일한 방법, 그것은 오직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던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백정이라고 고백하지 마라. 한때의 분노나 비애로 이 훈계를 잊으면 그때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거라 생각해라” 하고 아버지는 가르쳤던 것이다. --- p.16
경모나 동정이나 모두, 선배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속의 간절함은 자신 역시 백정이라는 처절한 사실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이상 아무리 입이 닳도록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한들 자신의 진정이 선배 가슴을 울릴 리는 없다. (중략) 그래, 적어도 그 선배에게만이라도 이야기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우시마쓰는 즐거운 재회의 날을 상상해보았다. --- p.113
아아, 무정한 세상에 분노하던 선배의 마음과, 세상을 따르라고 가르친 아버지의 마음,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 p.166
“백정이라는 것은 그 정도로 비천한 계급이랍니다. 만일 그 백정이 이 교실에 와서 여러분에게 국어나 지리를 가르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실은 저는 그 비천한 백정의 한 사람입니다.”
백정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 세가와 우시마쓰는 천한 신분 때문에 사회에 나가지 못하고 산속 부락에 숨어 살다시피 하는 아버지가 ‘절대 신분을 밝히지 마라’고 한 말을 줄곧 가슴에 품고 살아왔으나, 같은 백정 출신의 사상가 이노코 렌타로가 당당히 신분을 밝히고 차별의 시선에 맞서는 모습에 동경을 품게 된다. 다소 우유부단하고 온건한 성품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 탓에 교사라는 사회적 입장과 시선에서 좀처럼 자유로워지지 못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서, 여태껏 계율처럼 여겨온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싶은 파계의 욕구와 두려움 사이를 오가면서 끊임없는 번뇌에 사로잡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