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탑사(靑?社)를 세우고 잡지 『청탑』을 출간하고 있었던 히라쓰카 라이초(平塚らいてう)에게 편지를 보냈다. 『청탑』은 ‘여자는 남자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인습을 타파하고, 억눌려왔던 여성들의 문예와 사상의 재능을 더욱더 꽃피우자고 주장하는 잡지였다. 이 사람이라면 분명 힘이 되어 줄 거야. 그렇게 믿고 필사적으로 편지를 썼다. 나중에 라이초는 노에에게 받은 편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봄이 한창이었을 때로 기억합니다만, 규슈에 사는 한 소녀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왔습니다. 우표를 세 장 붙인 묵직한 봉투에, 펜글씨로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후쿠오카현 이토시마군 이마주쿠마을, 이토 노에’라고 꾸밈없이 또박또박 쓴 글씨였습니다. 청탑사에는 종종 누군지 모르는 여성으로부터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상담을 요청하는 장문의 편지가 오곤 했는데, 하나하나 답장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노에의 편지를 읽어본 후에 저는 노에가 온몸으로 자신의 고민과 맞서는 듯한 내용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자신이 살아온 삶, 성격, 받아왔던 교육, 자신이 놓인 처지-특히 현재 친인척에게 강요당하고 있는 결혼에 대한 괴로움 등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는데, 거기에는 도덕, 인습에 대한 거의 무의식적인 반항심이 맹렬하게 들끓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박력이 넘치는 문장이었을 것이다. 라이초가 받은 수많은 편지 중에서도 노에가 보낸 것은 한층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소리다. 맹렬하게 들끓는 반항심. 노에는 자신의 전부를 라이초에게 내보였을 것이다. 며칠 후에, 노에는 라이초의 집을 찾아갔다. 라이초는 편지의 주소를 보고 규슈에 사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에의 방문에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라이초가 본 노에는 작은 체구에 다부진 몸매, 통통하고 둥근 얼굴에 크고 부리부리한 검은 눈동자가 빛나는, 야성미 넘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생명력 가득한 시골 소녀. 그렇지만 그저 평범한 소녀가 아니다. 노에는 첫 대면임에도 라이초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조리 있게 말했다. 정열적인 매력이 철철 넘친다. 아아, 여성이 인습에 맞선다는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청탑사는 어떻게든 이 소녀를 도와야 한다. 라이초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에는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쏟아내고, 홀가분한 듯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모님을 설득하고 오겠습니다.”라며 돌아갔다고 한다. 멋지다.
--- 2장 ‘누가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중에서
먼저 노에는 『청탑』의 새로운 편집 방침을 발표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청탑사의 모든 규칙을 없애겠습니다. 청탑은 앞으로 무규칙, 무방침, 무주장무주의(無主張無主義)입니다. 주의가 필요하신 분, 규칙이 꼭 있어야 하는 분들은 각자 만드세요. 나는 어떤 주의도 방침도 규칙도 없는 잡지를 모든 여성에게 제공하겠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규칙, 무방침, 무주장무주의’ 노선이다. 상당히 과감한 방침이다. 물론 일을 대충 하겠다거나 아무 의미도 없는 글을 싣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해서는 안 되는 말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미풍양속 따위는 무시해버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이다. 힘을 다해 죽을 각오로 닥치는 대로 쓰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그런 방침을 세운 덕분에 『청탑』 제2기에서는 세 가지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정조 논쟁·낙태 논쟁·폐창 논쟁이 그것이다.
--- 3장 ‘힘을 다해 죽을 각오로 닥치는 대로 써라’ 중에서
9일에 노에는 불같은 노여움을 담아 내무대신 고토 신페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실 이 편지는 2002년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원래 전집에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미즈사와(水?)에 있는 고토 신페이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져, 그 후 전집 증보판에 수록되었다. 두루마리에 쓴 편지로, 다 펼치면 길이가 4미터에 이른다. 그 길고 힘 있는 문장에서 어마어마한 노여움이 전해진다.“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나는 일개 무정부주의자입니다.”이렇게 시작되는 편지에서 노에는 우선, 오스기가 왜 구류되었는가, 어째서 오스기만 계속 구류되어야 하는가를 따져 묻고 있다. 그리고는 오스기를 방면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다. 그 대신 재판 투쟁에서 보란 듯이 미쳐 날뛰어 주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된다. 지금 당신에게 오스기를 구속한 이유를 물어보러 가도 될까요? 아니, 지금 가겠습니다. 단단히 각오하고 기다리세요.
나를 미행하는 순사는 당신의 문 앞에서 벌벌 떨고, 당신은 나와 만나기를 두려워합니다. 조금 우습네요. 나는 올해로 스물넷이 되었으니 당신 따님 정도의 나이죠?
그러나 당신보다는 내가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 힘은 당신의 온몸의 피를 거꾸로 솟구치게 할 정도는 됩니다.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일국의 위정자이지만 나보다 약합니다.
--- 6장 ‘당신은 일국의 위정자이지만 나보다 약합니다’ 중에서
이 책은 저자 구라하라 야스시가 백 년 전 일본의 아나키스트 이토 노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쓴 일종의 평전이다. 저자는 자신의 연애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을 때 노에의 글을 읽었다고 한다. 결혼을 앞두고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던 그에게 노에의 삶은 무엇보다 ‘생(生)의 부채화’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상대방도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쌓아 그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관계. 살아있는 것 자체가 부채가 되어버리는 이런 사회에서는 서로를 향한 마음도 손익계산으로 쉽게 변질된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의 고정과 함께 삶의 방식이 한정되어 버리는 것에 대한 폐색감. 내 집 마련을 위해 30년이 넘는 대출상환 기간 동안 은행에 미래를 저당 잡히는 것도 모자라, 정규직 직장이라는 암묵적인 자격이 요청되는 결혼제도 앞에서 저자가 느껴야 했던 좌절감은 전작에서도 에피소드로 등장할 만큼 중요한 사유의 계기였다.
“인간 사회는 약속의 축적으로 이루어진다. (중략) 그리고 그런 사회의 토대가 되는 것이 바로 결혼이다.”
“지금 남자들과 주고받는 약속은 불평등하다. 그러니 그것을 개선하자. 남자와 정치적, 경제적 평등을 이루어내자, (중략) 새로운 약속을 교환하면 문제는 개선될 수 있다.”
백 년 전 일본이라는 시공간에서 노에는 이런 주장들이 ‘급진적’인 것이라 여겨졌던 때조차 “약속 그 자체를 파기하자”며 이의를 제기했다. 아무리 좋은 약속이라도 개개인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규정짓는다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아직 구현되지 않은 행동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정해진 약속 때문에 하나만을 추구하면서 잠재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을 무수한 생을 말살당하게 된다. 그러니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제멋대로 살고 싶다! 저자가 노에의 삶에 끌렸던 지점 또한 바로 여기가 아니었을까?
--- 역자후기 ‘새로운 약속을 교환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