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비명소리는 아무리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막 잠자리에 들었던 서우는 마름소랑의 처소 쪽에서 들리는 여인의 비명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차마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고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니 공포감이 더했다. 이럴 때는 아신이 와주었으면 좋으련만 제 방으로 건너간 지가 오래이니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었다. 한번 잠들면 어찌해도 깨지 않는 잠귀 어두운 아이가 다시 깨어 올 리도 없는 것이었다.
“아아아악!”
다시 비명소리가 들리자 서우는 두 눈을 꼭 감고 얇은 요를 끌어안았다. 비명이 잦아들었나 싶었더니 사이 문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에 서우는 다시금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서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아신이니?”
커다란 그림자가 잠시 머뭇거리지도 않고 방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씁쓸한 그의 체향이 먼저 다가왔다.
“이 밤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그가 온 것이 반가운데 마음과는 다른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그냥 왔어. 아니야. 실은 보고 싶어서 왔다.”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던 마름소랑은 금세 다시 말을 바꾸었다. 그 목소리에는 단호함까지 어리었다.
“놀리지 마세요.”
그녀의 목청이 사르르 떨리었다.
“놀림이 아니다. 너는 내가 여기 올 때마다 어쩐 일이냐고 묻지? 왜 왔냐고 묻지? 하지만 사내가 여인의 방으로 걸음 하는데 달리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인가. 나는 사내다. 그러니 아름다운 여인을 품고 싶은 것이 당연한 것이지. 널 안고 싶어서 왔다. 그리고…… 보고 싶어서 왔다.”
마름소랑은 그녀가 자신이 말하는 동안 끼어들어 매몰차게 밀어낼까 겁이나 서둘러 말을 끝냈다. 그리고서는 손을 뻗어 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돌아가지도 못한 채 어둠 속에 멀거니 그녀만 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이런 맹추 짓이 있나. 저 스스로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가서 왈칵 안아버리면 그만이지, 저 조그만 몸으로 바르작거리어 보았자 콱 눌러 입을 맞춰버리면 그만이지. 생각은 그랬지만 한 발을 앞으로 내딛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숱하게 안아왔던 백련의 아름다운 몸이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우홍의 뱀 같은 손가락이 자신의 샅을 더듬을 때, 그의 마음속에 서우만이 가득했다. 그것은 하루, 한 시각, 가면 갈수록 갈증같이 애타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것을 어쩌면 좋으냐.
저가 더럽혀 놓고서, 그리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막 대해 놓고도 우홍이 막말로 이년 저년 하는 것은 듣지를 못하겠더라. 당장에라도 그 못된 것의 목을 부러뜨려놓고 싶을 만큼 불끈 화가 치솟고 이가 갈리었다. 그까짓 풀 따위야 어떻게 되든 말든 정말은 그 요망한 것 입으로 서우의 욕을 하는 것이 싫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냥 한달음에 달려 이곳으로 오고 싶었다. 너의 얼굴을 이리 보고서야 내가 마음이 개운한 것을.’
“밀어내지 마.”
‘산중에서 살기등등한 산도적들과 칼과 칼을 맞대고 섰을 때보다도 네게서 나올 말이 더 무섭다. 나는…… 나는 서우야.’
“날…… 밀어내지 마라.”
애교를 떨며 눈웃음 짓고 짙은 향내 풍기며 안겨오지 않아도 좋다.
‘그냥 내게서 떠나지 말고 곁에 있어주련.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내 눈길이 닿는 곳에 있어주어. 그러면 내가 천년만년 아껴 주께. 매일 매일 등에 업고 네가 가자는 대로 산에 가고, 들에 가고 덩실덩실 춤을 출게.’
정말로 그 말이, 마름소랑은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그녀에게로 뻗어 살며시 보드라운 뺨을 매만지니 손끝을 타고 전신으로 스며드는 것이 오직 따스함이다. 그것이 격한 감동이었다.
“날 좀 봐.”
마름소랑은 한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지도 손을 들어 막지 않자 다시 조심스럽게 한 발을 더 내디뎠다. 그리고 가만히 앞에 선 그녀의 귓가에 스치듯 가볍게 입술을 누르며 애타게 속삭였다.
“널 보고 있으면 나는 여기가 아프다. 송곳으로 찌른 듯 칼로 후벼 판 듯 몹시 아파. 지금 누구보다 너의 웃는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이 나이건만…… 널 웃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나냐? 그러하냐? 허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
그는 서우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로 가져다 대었다. 애타는 갈증으로 뜨겁게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이, 자신이 늘어놓아야 할 구차한 변명을 대신하여 그녀의 손바닥을 타고 그녀에게로 부디 흘러들어가도록.
서우는 짙은 어둠 속 익숙해진 흐릿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지금 내게 뭐라고 하고 있는 것이야? 내가 멍청하여 이 사람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헌데 이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어찌하여 이렇게 가슴이 따끔거릴까. 왜 이렇게 옥죄어 올까.’
마음 깊이로는 진작부터 마름소랑이 밉지도 않으면서 그가 하는 양이 모다 거칠고 사납기만 하니 선뜻 말이 곱게 나가지지를 않았었다. 부러 고개를 외면했다. 그를 용서하는 것이, 마치 아비에게 죄를 지은 듯하고 가문에 씻지 못할 죄를 씌운 것 같으니 그렇게 내내 제 마음 외면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부정한 것 같아 억지로 뿌리치는 것이었다.
“나를 버린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그리 각오하고 있어라. 웃음을 파는 재주도 없는 것이 고개만 뻣뻣하다고 그리 무섭고 매몰차게 말하였지 않습니까. 그래 놓고서 이제 와 내게 무슨 말을 하시는 겝니까? 절 보고 어찌하라고요.”
서우는 마름소랑 때문에 몹시도 혼란하였다. 어쩌면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 때문에 더 혼란하였다.
“그건! 그건…… 그래. 내 입으로 버린다 했지.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네가 나를 하찮은 장사치라 치를 떨며 밀어내고 늘 경멸하는 듯하니, 내가 자격지심으로 두고 보자 나도 너 버릴 수 있다 했다. 헌데 그럴 수 없으니 어찌하나. 제기, 그러니 내가 네게 와서 이리 빌고 있지를 않아.”
“대체 내게 왜 이러십니까. 날…… 날 그냥 내버려둬요.”
“싫다. 그러고 싶지 않아.”
“그리하겠다 약조하셨지 않아요. 절, 원대로 그냥 내버려두겠다고요.”
“그래 약속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원래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더냐. 너도 알지?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인걸. 속으로는 너를 만지고 싶어 안달을 하면서도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을 너를 안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어 갈증이 일었지만 그것이 아니라고 뻔뻔히 거짓말을 하였다. 너는 착한 사람이 아니냐. 나와는 다른 사람이 아니냐. 그러니 네가 나를 봐줘야지. 이해해줘야지.”
말투는 여전히 당당하였지만 살며시 떨리는 말 속에 숨어 있는 것이 그의 투박한 진심인 것을…….
‘조금만 이이를 의지하며 살면 안 될까? 가문을 더럽히고도 목숨을 끊지 못하여 구차하게 살았더니 날보고 같이 행복하잖다. 그래도 될까? 조금만 의지하여 살면 안 될까? 내가 그래도 될까?’
가슴 속에서 가느다란 실과 같은 것이 툭, 하고 끊어졌다.
콧등이 시큰하여 절로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까칠하게 수염이 난 마름소랑의 뺨을 매만졌다. 그가 잠시 움찔 놀라 몸을 굳혔다가 자신의 손을 그 위로 겹쳐 놓았다.
시선을 마주하기는 하였으나 밤이 어두워 기이한 적안의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 안에 자신이 있음을 이제 와 어찌 외면할 것인가.
“안을 것이다.”
안을 것이다. 그러니 제발 내치지만 말아다오, 하는 부탁이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고 머리카락 사이 손가락을 넣어 묶인 매듭 사이를 헤집으니 가닥다각 곱게 땋아 올린 머리 힘을 잃고 스르르 풀어 등허리로 내려온다. 그 서늘한 감촉이 비단보다 부드럽게 손바닥을 간질이며 감싸 안았다.
“입도 맞출 것이다.”
말을 해놓고 주저하며 그녀의 낯을 바라보니 대답 대신 뺨 위로 곱게 꽃물이 든다.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온몸을 꽁꽁 묶어 놓았던 긴장이 풀려 마름소랑은 작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서우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이제 되었다.’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