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해석일 뿐이라는 니체의 말은 이제는 오히려 진부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니체의 다원주의는 모든 해석을 인정하자는 무분별한 상대주의와 그것의 필연적 귀결인 허무주의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다원성 안에서 타자와의 평화적 공존 상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원성은 전쟁을 동반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반동적인 억압의 상태(여기에 기독교 도덕, 원한 감정, 삶에의 의지, 진리에의 의지가 있습니다)이거나 창조적인 전쟁의 상태일 뿐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전쟁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전쟁입니다. 그것은 상대를 말살시키고자 하는 전쟁과는 다른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은 모두 자신을 극복하는 힘의 흘러넘침에 몸을 내맡겨야 합니다.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타락입니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상대주의적 공존이 아닌, 전쟁의 상태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바로 이러한 전쟁의 기록입니다.
--- p.5
니체가 진단한 당시 유럽의 병증은 이 창조와 파괴를 부정하는 것이 원인이 됩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부터, 그리고 종교적 플라톤주의인 기독교에서부터 유럽적 사유의 역사 속에 변함없이 지속되는 유일신, 진리, 이데아, 이념, 주체 등은 모두 변화를 거부하고 안정된 상태로 머물러 있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투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여기’의 삶을 부정하는 이념으로 작용합니다. 이 병든 유럽 문화에 대한 진단으로 제시되는 개념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파괴, 몰락, 변화, 생성 등의 가치입니다. 니체가 당대의 시대, 그리고 유럽 역사 전체를 데카당의 시대, 이를테면 몰락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파괴에 따른 생성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53
“신은 죽었다”라는 광인의 외침은 니체의 수많은 문장 중 가장 유명한 문장일 겁니다. 이 짧은 문장으로 니체는 서구의 형이상학과 종교 전체를 대담하게 전복한 철학자가 된 것입니다. 신이 죽었다면, 더 이상 절대적이고 초월론적 지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입니다. 그는 신의 죽음을 선언함으로써 진리, 불변, 완전성, 초월성 등 철학과 종 교의 전통적 이상들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신의 죽음으로 인해 절대적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흔한 이해가 아닙니다.
--- p.56
기존의 세계, 가치, 의무를 거부하는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대안을 요구받습니다. 그러한 대안이 없다면, 기존의 세계에 대한 저항과 반박은 오히려 위험한 것, 의심스러운 것, 반대를 위한 무의미한 반대, 즉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직 파괴만 일삼는 비생산적 행위로 취급됩니다. 하지만 사자의 정신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 표면적으로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행위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행위의 토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안적 세계의 전망이 있기 때문에 기존의 세계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합리적 대안이 있기 때문에 현재를 거부하는 것은 안전한 토대 속에 머물고자 하는 약한 자들의 생리일 뿐입니다. 합리적 대안이란 기존의 세계의 가치와 구조 속에서만 합리 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p.81
니체가 토리노에서 말의 목을 끌어안으며 쓰러진 이후 10년간 독일은 니체를 자신의 군국주의와 민족적 패권주의를 지지하는 철학자로 오독했고, 니체의 명성은 오히려 그의 사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지지한 사람들에 의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누구보다 독일적 민족주의와 군국주의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어려운 논증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는 니체가 경멸해 마지않는 무리 도덕, 노예 도덕의 소산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p.126
선악의 윤리적 판단의 제거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비윤리적 행위의 무한정한 허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윤리라고 불리어온 것에 대한 반성과 스스로에 대한 무한 책임을 요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비윤리의 윤리라고 부를 만한 것입니다. 친구이자 적이라는 말을 통해 차라투스트라는 타자에게 자신과 동일해지기를 요청하지 않고, 자신과 같은 높이를, 위대함을 요구합니다. 공동체의 진정한 이상은 동일화된 타자와 거주하는 전체주의적 사회가 아니라, 타자와 진정 공존하는 사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친구가 적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우정에 관한 가르침이야말로 진정 우정이라고 불릴 만한 것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일 것입니다.
--- p.152
차라투스트라가 베푸는 덕이란, 그 덕을 받은 이가 완성하는 것입니다. 즉 받은 이가 다시 ‘덕을 베푸는 자’가 되기 전에는 그것은 아직 완전한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증여는 교환 관계를 통해 완성되는 증여가 아니라, 교환 관계에서의 해방을 통해 증여가 완성되는 덕입니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복음’이며, 말 그대로 ‘베푸는’ 것의 의미이고, 이 베풂이 결코 동정과 연민이 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 p.199
교환 관계를 은폐하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 삼았다는 데 가톨릭의 취약함이 있습니다. 개신교의 믿음은 훨씬 더 은밀하게 그 교환 관계를 설정합니다. 신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구원에 값을 매기는 데 반대한 루터는 결코 교환이라는 근원적 구원의 경제학/형식에 반대한 게 아닙니다. 그가 반대한 것은 그러한 교환으로 인간이 내놓아야 할 대가가 일정한 금액이라는 한정된 대가인 점이었습니다. 믿음은 교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신교는 신과의 교환에서 인간이 제시해야 할 판돈을 끝없이 올려놓습니다. 그 판돈이 인간의 전 생애여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판돈이 아니고서는 신과의 거래란 감히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를 통해 루터는 인간을 신 앞에 완전히 바치고 맙니다.
--- p.234
모든 부정의 끝에서 니체는 극적으로 전환하여, 세계를 긍정합니다. 이 세계의 긍정은 개별화의 긍정이며, 현존재의 긍정이고, 고통의 긍정입니다. 긍정이란 수동적인 수용이나 운명에의 순응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용기이자 도전입니다. 감수한다는 것은 도피와 다릅니다. 쇼펜하우어가 고통에서 도피하고자 했다면, 니체는 고통을 감수하고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니체의 ‘운명에의 사랑’에서 드러난 극적 전환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 p.310~311
지금 현재 하고자 하는 것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원하는 것, 이것은 영원회귀의 인식이 아니라 영원회귀의 의지입니다. 운명에의 사랑은 현재에 대한 긍정이자, 그것이 뻗어나가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긍정이라는 점에서 이중의 긍정이며, 우연성을 긍정함과 동시에 필연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또한 이중의 긍정입니다. 이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운명의 돌,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와 마찬가지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돌을 기꺼이 던지고자 합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몸을 부순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 p.343~344
우리는 이제 우리의 몸이 병들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연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을, 구역질을 느낍니다. 그리고 실은, 니체의 철학이 우리를 제대로 인도하는 부분은 바로 여기까지입니다. 니체의 철학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도록 만들 뿐입니다. 어쩌면 니체는 가장 무책임한 철학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철학이란 것이 세계를 행복하고 즐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했던가요.
--- p.377~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