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은 뭐지? 공부 기계? 영어 100점? 외국어고등학교? 일류 대학?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 소용없는 것이었다. 이제 너무 지쳐 버렸다. 지겹다. 아니, 질린다. 엄마에게 하소연해봐야 돌아올 소리는 뻔하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내가 이러는 거야! 너는 아무 생각 말고 엄마 말만 들으면 돼!’
배부른 소리라고? 나를 위한다고? 엄마 말만 들으면 된다고? 아, 미치겠다!
은영이와 헤어지고 집에 왔다. 엄마는 내가 시험 끝나고 학원에 들러 공부하고 온 줄 알았다. 나도 태연히 그런 척했다. 가방을 뒤져 오늘 본 모의고사 시험지를 찾아 보여주며 영어가 만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가 살짝 웃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대로 지나가지 않았다.
“역시 학원 바꾸길 잘했어! 하지만 한 번 100점 받았다고 방심하면 안 돼! 마음 놓으려면 아직 멀었어. 이제 3학년 때까지 무조건 100점 받아야 돼!”
나는 숨이 탁 막혔다. 엄마의 지칠 줄 모르는 욕심이 머리를 터지게 한다. 칭찬은 놔두고라도 잔소리나 더 듣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그새 더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됐어?」중에서
나는 절규한다. 외침은 크지 않다. 도저히 나의 별자리를 그을 맥락을 못 찾겠다. 엄마 별만 유독 빛나는 우리 집. 엄마 별에 내 별의 선을 이어붙이기는 싫다. 휴대전화를 열어 초기 화면 배경 글을 ‘이제 됐어!’라고 찍어 넣었다. 이제 된 것이다. 나를 외칠 준비가 다 끝난 것이다.
방 창문을 열고 보니 아파트 숲 사이로 별똥별 하나가 지고 있었다. 저 별똥별도 끝내 자기 자리를 못 지키고 떨어지는 것이리라. 잠시 후 나도 별자리를 만들지 못한 별똥별이 되려 한다. 그러나 별똥별처럼 우아하게 지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휴대전화를 열어 문자를 찍었다.
엄마, 영어 100점 맞았으니까, 이제 됐어?
물론 엄마는 아직 안 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멀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기어코 별똥별이 되고 말아야 한다. 나는 재빨리 문자를 전송하고, 휴대전화기를 창틀에 내려놓은 뒤 20층 아파트의 창틀에 섰다. 내가, 별똥별이, 된다.
---「이제 됐어?」중에서
“여보세요? 거기…….”
여자였다. 그러나 전화선을 타고 넘어온 목소리만으로는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나이를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누구냐고 물으려다 저 쪽에서 말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네, 말씀하세요.”
“거기 글 쓰시는…….”
나를 찾는 전화인 것 같기는 했다. 여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돌려드릴 것이 있어서요…….”
뜬금없는 소리였다. 나는 잠시 멍해져서 다시 침묵했다. 여자가 잠깐 사이를 둔 뒤 더듬더듬 말했다.
“스무 해 동안, 갇혀 있던, 말들이에요…….”
여자는 내 사정은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중에서
가까이 다가가 여자를 보는 순간, 나는 온몸이 굳어버리는 줄 알았다. 현아였다. 옷차림과 몸피는 예전과 다르지만 얼굴 모습은 거의 스무 해 전 여고생 때의 청순하던 소녀 모습 그대로인 현아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현아…….”
이름 말고는 다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현아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손을 내려다보며 마주 잡았다. 여전히 희고 맑은 손이었다. 찌릿찌릿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문득 그 옛날 현아가 손을 내밀어 첫 악수를 청하던 때가 떠올랐다. 내 느낌은 순식간에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 둘은 그렇게 손을 잡은 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곧 현아는 봉투 속에서 공책을 한 권 꺼낸 뒤 다짜고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공책을 받아든 뒤 겉표지를 펼쳤다. 속표지에 검정 만년필 글씨로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을 내 사랑하는 소녀 현아에게 바친다’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에는 날짜와 내 이름이 휘갈겨져 있었다.
“아!”
나는 짧은 신음만 내뱉은 채 공책을 뒤적여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해 겨울의 찬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중에서
“그동안 나 미워했지요?”
나는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현아를 미워했을까?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애써 잊으려고 한 게 꼭 미움 탓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현아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많이 미웠을 거예요…….”
현아가 더듬거렸다.
“음, 남편이, 죽었어요.”
“어!”
나는 외마디 소리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현아 남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나는 아직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야 이 시집이 나한테 전해진 거예요.”
“뭐라구?”
남편이 죽고 나서라니? 그렇다면 그 친구 녀석이 현아 남편? 아, 그 녀석도 현아를 좋아했구나. 내 수제품 시집이 현아에게 전달 안 된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시집을 왜 내게 다시 돌려주지도 않고 없애버리지도 않았을까?
“미안해요.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을 이제야 돌려드리게 되어서. 그때 받았으면 바로 돌려드렸을 텐데……. 시집 속의 말들이 스무 해 동안이나 갇혀 있느라 무척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돌려드리려고…….”
아, 그런데, 나는 무엇이, 아니 누가 20년 동안 갇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공책을 다시 현아 쪽으로 슬며시 내밀었다. 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둔 뒤엔 처음으로 이는 어지럼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이건 현아 아니면 누구에게도 소용없는 시야. 여기 들어 있는 시는 현아한테만 어울리게 쓰인 것이거든. 현아 남편이 된 그 친구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한테 다시 되돌려주지도 못하고 없애버리지도 못한 거야. 그러니 시를 쓴 나도 주인이 아니야. 그럼 이만…….”
밖에는 여전히 눈이 퍼붓고 있었다. 눈길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발걸음을 뗄 때마다 ‘오빠’라는 소리가 밟히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중에서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나자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다. 엄마가 식당으로 일을 나갔지만 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제발이지 시간이 고장이라도 나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 아빠의 죽음이 무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일……. 그래서 나는 가장으로서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 나 공고 갈 거야. 아빠도 안 계신데 대학까지 갈 수 없잖아. 거기 가서 빨리 기술 배워 취직할 거야. 다니는 동안은 아르바이트하고!”
---「가장의 자격」중에서
꼬꼬큰닭치킨 배달 일은 나쁘지 않았다. 열여섯 살 생일이 지나자마자 바로 오토바이 면허를 따서 배달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하기는 너무 힘들어. 그냥 학교 그만두고 일찌감치 돈벌이나 할까 보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물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아예 돈벌이에 나설까,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할까.
나는 엉뚱하게도 기왕에 가장 노릇을 하려면 학교부터 때려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내 나이보다 어린 사람이 가정을 이루기도 했는데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하나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학교에서 하는 모든 일이 다 시시해 보였다.
---「가장의 자격」중에서
미래를 위해서 학교를 다니고 공부한다지만 대한민국의 공고생에게 미래가 열리면 얼마나 열리겠는가? 그냥 지금 피 끓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증조할머니처럼 한 세기 가까이 사는 사람도 있지만 아빠처럼 반세기도 못 사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나의 명줄은 어디 가장의 자격까지 이어져 있을까?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그걸 안다면 재미없더라도 학교를 계속 다니든, 돈벌이에 본격적으로 나서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살림을 차리든, 결정하기가 훨씬 쉬울 텐데…….
---「가장의 자격」중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진압군의 일원으로 투입된 아버지는 그날 이후 우울한 군 생활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행위가 정당성을 갖추기 어려워서였다. 그러다 그걸 털어버리려고 한 행동이 결정적으로 아버지를 몰락시키고 말았다. 더구나 그 여파가 나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지갑 사건과 방송 사건이 겹쳐, 나는 아주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인생은 어쩌자고 이토록 엉뚱하게 비틀어져 뒤죽박죽인지 모르겠다.
---「눈을 감는다」중에서
나는 나를 설득하고 싶지 않다. 내겐 눈부신 태양이 없다. 밝은 미래가 없다. 내 운명은 이미 결정나버렸다. 그렇다고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동원해서라도 삶의 중요성을 강조해주는 이도 없다. 어차피 나는 출신 성분부터 ‘찌끄러기’과이다. 어느 누가 이런 나를 무슨 애정이 있어 설득할 것인가. 나부터도 나를 설득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대로 내가 더 망가지고 짓밟히는 게 싫은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쯤에서라도 정말로 나를 보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은 나를 진정으로 보호하여 더 망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한강 다리까지 온 것이다.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뿐이다. 지금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이렇게 내 발로 올라와 있는 것이다.
---「눈을 감는다」중에서
잠시 후 내 몸을 받는 한강 물이 아주 짧은 순간 첨벙 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이내 곧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을 것이다. 다만 몇몇 사람들은, 사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내 뒤처리를 하느라 좀 수고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뿐일 것이다. 나는 스무 날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는 매미의 절규만큼의 흔적도 남기지 못했으므로. 아버지는? 내 이름을 몇 번 더 부르겠지. 정신을 놓았어도 평생 병사들 이름 부르던 습관은 놓지 못했으므로. 그러나 나는, 이제 나 대신 나로 여겨지던 내 이름조차 놓아버린다.
---「눈을 감는다」중에서
여느 여선생님들과는 다른, 아니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살면서 만난 여느 여자들과도 다른 독특함이 그녀에겐 있었다. 독특함, 그게 뭔지 구체적으로 잡히지는 않는다.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뭔가 있기는 있다. 나를 숨 막히게 한 그 무엇. 그 무엇이 그녀에겐 있다. 이 세상의 관계나 현상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또 설명할 필요도 없다. 느낌이 좋으면 되고, 말로 할 수는 없지만 서로 교감이 이루어지면 된다. 삶이란 것, 어차피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나는 안다. 나도 그녀처럼 여자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녀와 달리 학생 신분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이 세상을 살면서 엄마에게서도 못 느껴보던, 아니 또래의 다른 어느 친구에게서도 못 느껴보던 그 무엇, 그 무엇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대상이 여자든 남자든 나이가 들었든 안 들었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그녀는 나의 이런 마음을 모른다. 알 리가 없다. 수많은 학생 가운데 하나일 뿐인 나를 어떻게 알 것인가? 그러나 나는 조만간에 그녀한테 수많은 학생 가운데 하나가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너는 깊다」중에서
그녀를 두고 요 며칠 사이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원어민 교사인 그녀가 동성애자라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원래 남자인데 여자로 성전환을 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사택 골목길에서 어떤 여자랑 포옹하는 장면을 보았다느니, 인터넷 어느 사이트에 가면 어떤 여자랑 다정히 팔짱을 끼고 있는 그녀 사진을 볼 수 있다느니 하는 소문이 그럴싸하게 났다. 나는 픽 웃음이 나왔다.
---「너는 깊다」중에서
“이 그림에 숨소리를 넣어주세요.”
그녀가 연습장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가느다란 숨소리를 내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내 숨소리가 더 커지는 걸 느꼈다. 커지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따라 점점 그녀 안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녀 안에서 나는 돌아 가신 아빠를 느꼈고, 나를 믿는 엄마를 느꼈고, 말 한마디로 할 말을 다한 중학교 때 반장 아이를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느꼈다. 내가 무엇인지조차 미처 모르던 나. 이제야 비로소 나를 느낀 것이다. 그녀 안에서 나는 깊어진 것이다.
---「너는 깊다」중에서
“숨소리를 넣어달라고 했나요? 그런데 사람은 남의 숨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숨소리를 의식하며 살 때 가장 사람답지요.”
마치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타인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세요. 자신의 숨소리가 어디까지 미치는가를 들여다보고 그걸 그림으로 그려보세요. 그림 속에서 남의 숨소리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숨소리가 느껴지도록 말이에요. 그럴수록 사람은 깊어지는 거예요.”
---「너는 깊다」중에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이미 우리는 말없이 통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두 연인은 동시에 서로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아니라고 느꼈다. 우리는 한쪽이 사랑하는 만큼 다른 쪽도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망설일 새 없이 바로 그녀를 택했듯이, 그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를 택했다. 어쩌면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너는 깊다」중에서
두 사람은 며칠 전부터 마을 들머리에 있는 저수지 한쪽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낚싯대를 걸쳐놓긴 했지만 사실 그들은 낚시질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이 더운 날씨에 그들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피는 건 낚싯대가 드리워진 저수지 수면이 아니라 오로지 마을 쪽 움직임이었다.
“그래, 마을에 낚을 만한 멍멍이가 많이 있더란 말이제?”
“아따, 또 같은 말 녹음기 틀어 되풀이하게 하시오? 모르긴 몰라도 노랑이, 흰둥이, 검둥이 해서 스물댓 마리는 족히 되더란께요.”
“흐흐, 스물댓 마리라……. 스무 마리만 낚아서 팔아도 이참에 한 밑천 단단히 잡겄구먼. 그려도 다 팔아 넘기지는 말고 한 마리는 단골집에 우리 몫으로 냄겨뒀다가 아무 때고 뒷다리 한 짝씩 푸지게 뜯어 먹세. 양기 보충허는디는 뭐니 뭐니 해도 개장국에 흐벅진 암캐 뒷다리가 최고여! 고건 먹어본 사람만 알제. 동생 안 그런가?”
---「국민건강영양보급업자가 낚지 못한 것」중에서
“형님은 참, 내 입이 뭔 방정이란 말이요? 주인 몰래 개 낚아서 내빼믄 쉽게 말해 그냥 개백정이제, 뭣이다요? 개 도둑으로 잡히지만 안 해도 다행이제…….”
김 씨의 개 도둑이란 말에 장 씨가 짐짓 발끈한다.
“내가 몇 번씩 말해야 알아들을란가? 우린 국민건강영양보급업자라니까! 도시 사람들 수입 쇠고기도 안 먹고 푸성귀도 무공해 환경식품만 찾아 먹는다고 별스럽게 난리 피우지만 우리가 공급하는 것보다 더 순수한 무공해 친환경식품이 어디 있겄어? 사실 말이야 바로 말이제, 우리가 대는 토종 똥개보다 더 순수한 신토불이가 어디 있겄냐고!”
---「국민건강영양보급업자가 낚지 못한 것」중에서
개잡이 작전이 끝나자 두 사람은 곧바로 차를 달려 한밤중에 서울에 도착한 뒤 개들을 중간 공급업자에게 넘겼다. 그런 다음 개장국을 잘하는 단골집에 들렀다. 새벽이 될 때까지 술과 더불어 영양 공급까지 충분히 한 뒤 두 사람은 헤어졌다. 장 씨가 알딸딸하고 넉넉한 기분으로 집 가까운 골목 어귀에 막 들어선 때였다. 어슴푸레한 새벽 가로등 불빛에 큼지막한 그림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림자의 정체는 흘레붙는 개들이 아니었다. 남녀 한 쌍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장 씨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이마를 찡그렸다. ‘요새 젊은 것들은 개하고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단 말이야. 누가 보든 말든 아무 데서나 저 모양이야……. 저것들을 확…….’
남녀 곁을 재빠르게 지나던 장 씨는 순간적으로 술이 확 깨면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서고 말았다.
“엥?”
올 초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내미가, 이번 국민건강영양공급 사업 출장 일로 집을 나설 때 재수학원 방학특강 수업비를 달라며 떼를 쓰던 딸내미가, 거기, 그렇게 사내 한 놈과 부둥켜안고 한 덩어리 되어 서 있는 것이었다.
개백정 출신의 국민건강영양공급업자인 장 씨도 끝내 딸년은 낚지 못하고 말았다.
---「국민건강영양보급업자가 낚지 못한 것」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