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나입니다.
하루. 오늘 이 하루 속엔 세상의 어떤 일들이 담겨집니다. 누군가 태어나고 죽었을 것이고 산비탈과 도로에선 사고가 났겠고 도시 곳곳에 빌딩과 집들과 가로등이 세워졌을 겁니다. 수천만 통의 편지가 쓰여지고 부쳐졌으며 받아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하잘것없어지고 무의미해지는 까닭은 전 죽어지지 않은 죽음을 수천 번 죽으며 살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헤어졌으므로 이 세계가 불타고 온 우주가 슬픔에 잠기며 제 목숨이 하잘것없이 내던져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망가졌고 제가 비참하므로 사람들 모두가 가엾어졌습니다. 그게 오는 제 하루입니다. 살아서 다시 맞고 싶지 않았던 오늘은 바로 당신과 헤어진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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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오래도록 기다렸습니다. 저 아닌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소중하고 더 간절하게 되길를. 제가 살고 죽어도 영원히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섬겨야 할 사람을 기다려왔습니다. 이 세계가 당신을 통해 운행되고 제 마음이 당신 감정에 의해 모래성으로 지어지고 허물어지게 만들 손을 가진 당신.... 첫 식탁을 차리듯 제 삶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에 담아 당신에게 내어놓스빈다. 풀잎을 세우는 햇빛처럼 꽃을 피우는 비처럼 나무를 세우는 바람처럼 그렇게 제 마음의 첫 순입니다. 당신을 통해 꽃피길 바랍니다. 이후 삶을 살며 그 어떤 절망과 참담한 시련일지라도 당신 떠올리 때마다 제가 순해지고 맑아지고 착해질 수 있도록 당신 사랑으로 축복해 주십시오.
--- p.89
당신의 향기.
무슨 향수 쓰시나요. 그대에게선 뭐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향기가 났었습니다. 향수는 뿌리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헤어진 뒤에야 그 향기의 근원을 알았습니다. 당신이므로, 세상의 유일한 당신이므로 당신이란 향기가 났다는 것을. 당신이 제게 준 눈빛과 미소, 몸짓과 장난스러움, 이 모든 것이 미묘하게 작용 일으킨 사랑이었다는 것을. 당신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떤 향수를 쓰시느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제게 어떤 사랑을 쓰시느냐고 묻겠습니다.
--- p.53
겨울편지.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 겨울, 나뭇가지뿐인 나무와 유리창 성에꽃으로 펜과 종이 삼아 씁니다. 어느 곳에 당신이 사는가를 모르는 전 창백한 내 마음에다 상처의 무늬를 쓰고 읽습니다. 요즘 환한 불면입니다. 다시....당신을 만나 당신과 꺼진 전등 속에 들어가 잠 잘 수 있다면. 당신을 더욱더 편안하고 따스하게 맞을 텐데. 전 당신 가슴속으로 눕고 당신은 제 마음속에 누워 햇빛 날리는 창문을 이 삶으로부터 선물 받을 수 있을 텐데.... 지금 내다본 나 이외의 세계는 다 어둡지만 전 당신만으로 밝습니다. 슬픔이 이토록 무한 동력으로 발열하는지 그저 불면마저 신기해할 뿐입니다.
--- p.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