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이 그 문장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한 글자 한 글자 점을 찍듯 읽어 간다. 오른손 검지의 담쟁이 잎이 문장에 긁히는 듯한 느낌…… 동시에 오른쪽 발바닥의 담쟁이 잎들이 꿈틀거리는 느낌…… 이 선명하게 끼쳐 온다. 나도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내 주변은 백색소음으로 꽉 차 버린 듯하다…… 자신의 귀에 들리는 않는 소리가 늘 귓전에 존재해 왔음을 깨닫는 순간의 당혹스러운 역난청. 안 보이는 소리의 경계가 휘우듬히 휘어지며 경계를 떠도는 이들의 슬픔이 오래된 필름 긁히는 소리처럼 팃팃거린다. 유령의 슬픔……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니? 그거라면 좀 아는 것 같은데, 나도,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유령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 나도 나에 대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싶다, 7년째 허깨비처럼 살고 있는, 내가 지겹다, 나는, 나를, 나는, 그만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살아 있지만, 누구에게도 도와 달라고 할 수가 없다, 나는,
모호한…… 존재의………… 계산법이다……………… 유경은 생각한다.
여기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난 그게 맘에 들어.
그의 목소리가, 유령 같은 유경의 몸 어디선가 튀어나온다. --- p.38
아무튼 넌 내 거야. 네가 지옥에 떨어져도 난 널 찾아갈 거니까. 날 떼어 놓을 생각 따윈 하지 마.
아, 맞아.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 이곳에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대. 쥘 베른은 이곳에 지구의 입구가 있다고 생각했다던데.
멋지군. 유경이 짧게 반응했다. 어서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나. 왠지 모를 불안감이 자욱하게 끼는 어두침침하고 적요한 거리였다. 엘프와 트롤과 도깨비와 유령 들이 카페테리아 사이를 배회하며 인간의 말을, ‘아직’ 인간인 존재들의 말을 엿듣고 있는 것 같은 백야.
밤이 너무 희어서 이상해.
유경이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 그가 커피의 마지막 모금을 마신 후 유경의 말에 이어진 말줄임표처럼 천천히 말했다.
시간이 얼크러지고 난폭해질수록…… 세상은 조용해져서…… 옷자락을 끄는 유령들의 고독이 선명해져…… 고독이 좋아…… 고독해지면……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을 것 같거든……. --- p.45
그랬다. 죽은 척하고 있었던 거, 스스로를 닫아 놓고, 걸어 잠가 놓고, 간신히, 그렇게 간신히 존재하던 거, 닫아거는 데도 여는 데도 그렇게 시간이 걸렸는데, 당신이 그랬잖아, 함께 보자고 그랬잖아, 그런데 뭐야, 이게! 젠장, 이름도 생각 안 나는 너라니! 다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 다 망가져서 기억 따위도 다 사라져서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어.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나, 죽은 척하고 있었는데, 간신히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 보려고 했는데, 죽은 척하고 살아 보니까 안 살아져. 그래서 미치겠어. 내게도 네게도 엄마에게도 있는 이 악착같은 담쟁이덩굴 따위, 징그러워, 징그럽다고! 유경이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빠르게 중얼거린다.
너의 이름을 그만 잊고 싶은, 내가 모르는 내가 있는 거라고?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었던 거라고? 지랄! 만약 그렇다면 ‘네 이름을 찾아야만 살겠어.’라고 내가 작정하면 떠올라 와야 할 것 아냐. 왜, 도대체 왜! 유경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화장실로 막 들어선 순간이었다. --- pp.73-74
죽은 유령들, 춤추는 유령들, 고개를 돌려 유경을 바라보는 유령들, 손짓하는 유령들을 지나, 기억의 밑바닥, 결국 모든 기억의 종점은 그에게 와서 끝나고 만다. 유경의 바닥인 그.
사람들은 말하잖아. 사랑만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고. 그런데 우리는 조금도 치유되지 못했던 거야. 나는 내 상처로부터. 너는 너의 상처로부터.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뭐였을까.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는데도! 너 하나만을 사랑해서 너 하나만을 원했지만, 죄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는 칼리의 헤드라이트 앞으로 날벌레들이 날아들며 퍽, 퍽, 터진다. 앞 유리에 끈적한 즙을 점점이 남긴 채.
와이읍에 접어들었다. 쏟아질 듯 별이 총총하다. 오래전 죽은 별들의 빛이 이제야 간신히 여기에 닿기도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여기서 바라보는 저 별들 중 어떤 별들은 이미 그 별의 사후 세계다. 유경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마를 찌푸린다. 나의 사후에는 어떤 눈동자가 나로 인해 먼 별을 올려다보며 죄책감 같은 것으로 탄식하는 일은 없을 거야. 우리 가계의 담쟁이덩굴은 나라는 잎이 지고나면 그걸로 깨끗이 사라지는 거다. --- pp.104-105
바위 옆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유경이 귓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귓속의 이명은 오직 그 자신밖에는 느낄 수 없다. 사랑이라고 믿은 것에도 이명 같은 부분이 있고야 마는 것일까. 자기 몸속을 울리는 이명을 타인이 대신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온몸 온 마음으로 사랑한 사람에게도 이명 같은 자기만의 방이 있는 것일까. 그는 간혹 북극의 곰이나 여우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북극에 직접 가겠다는 이야기 따위는 유경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북극이라니! 도대체 왜? 북극은 그에게 이명 같은 자기만의 방이었을까. --- p.112
엄마…… 와 나누고 싶다, 라고 유경은 생각했다.
그를 받아들일 때 유경은 엄마의, 한지숙의 알몸이 되려고 했다. 자신의 육체 속에 엄마가 있기라도 하듯이. 자신을 소중히 안고 천천히 침대로 옮겨 가는 남자의 심장 뛰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한지숙. 그녀가 되길 유경은 간절히 바랐다.
살살 움직여 줘. 아프지 않게. 상처가 많으니까. 물처럼 흐를 수 있게. 여기로 와. 내 옷은 버려 두고. 유경의 옷을 어디에 놓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던 그가 유경의 발등을 적신 강물이 마르기 전에 부드럽고 여린 혀로 유경의 발가락 사이를 지나간다. 간지러워……. 유경이 허리를 비틀며 웃는다. 모래톱 위에서 엄마가 허리를 비틀며 웃는다. 잘록한 허리에 비해 큰 가슴을 가졌던 엄마. 젖꽃판이 넓게 퍼진 엄마의 유방에 혀를 대 본다. 쿡, 엄마가 웃는다. 입속 가득 엄마의 젖꼭지를 문다. 달큰하고 비릿한 젖내가 흘러든다. 너 낳고 젖몸살이 심했지. 앞섶이 늘 젖어 버리곤 했어. 너는 젖을 참 세차게도 빨았단다. 먹어야 산다는 걸 미리 배운 아기 같았어.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를 핥으며 올라온 그의 혀가 거웃을 헤치고 있다. --- pp.138-139
비가 오면 세상이 느리게 움직여. 느리게 움직이면 다른 것들이 잘 보여. 비는 입이 많아. 비는 아주 다른 많은 언어로 말해. 여러 대륙을 흐르다 오늘 여기 내리는 비. 빗방울 속엔 수많은 언어가 녹아 있어. 나는 말이야, 엄마, 다음에 태어나면 비로 태어나고 싶어.
유경이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든다. 약속다방 창밖으로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남자가 보인다. 군복 색깔 점퍼를 입은 남자는 노쇠하면서도 비장한 느낌이 드는 뒷모습이다.
이 투명한 빗방울 속에는 누군가의 시체로부터 솟아난 물방울이 있을 것이다. 파리 떼, 구더기들, 파헤쳐진 내장 같은 것에서 생겨 나온 물방울도 있을 것이다. 구름이 빗방울로 떨어져 강으로 가고 바다로 가고…… 지구상의 물방울들은 일주일이면 지구를 한 바퀴 순환하게 된다고 했다. 간혹 중간 정체가 길어지는 여행도 있겠지.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몇 년씩 머무는 빗방울. 깊은 지하로 흘러들어 1000년 동안 꼼짝 안 하는 물방울. 해류를 타고 대양의 해저로 내려가 3000년 정도를 쉬다 나오는 물방울도 있다고 했다. 눈송이가 되어 극지방의 빙원에 떨어졌다가 얼음덩어리 깊숙한 바닥까지 내려가 수십만 년씩 기다린 다음 물이 되어 나오는 것들도 있다고 했다. 그 모든 물방울들의 여행…….
유경의 이명 속에서 이제 자신의 목소리가 된 그의 목소리가 방금 도착한 물방울처럼 생생하다.
--- pp.149-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