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소설가 주요섭의 6·25전쟁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다. 서울에 흩어져 살았던 한 대가족이 1950년 6월 25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이 될 때까지 95일간의 공산군 치하의 일상적 삶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주요섭 자신은 당시 이승만 정부의 말만 믿고 남쪽으로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잔류한 ‘낙오자’였다. 그는 인민군에 발견되어 남북되거나 의용군에 끌려가거나 북한 지방으로 소위 ‘전출’되지 않기 위해 집 뒤뜰에 토굴을 파서 서울 수복까지 그곳에서 숨어 살아남았다. 따라서 이 다큐멘터리 소설은 정부 공식문서나 통계에서는 볼 수 없는 미시사(微視史) 다시 말해 전쟁을 직접 겪은 일반 민간인들의 ‘작은 이야기’이다. 지금은 역사에서 서서히 ‘잊어진 전쟁’이 되어가고 있는 단군 이래 최악의 민족상잔의 충실한 기록인 장편소설 『길』은 6·25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를 위해서도 반드시 읽혀야 할 필독 역사소설이 되어야 할 것이다.
6·25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세대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그 후속 세대들은 6·25전쟁을 하나의 담론의 차원에서 논의하게 되고 6·25전쟁 담론에 나타나는 다양한 해석들의 차이로 인해 우리 민족사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6·25전쟁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서서히 묻혀져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처참한 전쟁의 역사를 망각한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 6·25전쟁은 외국에서는 ‘한국전쟁’으로 불리지마는 사실은 제3차 세계대전이나 다름없었다. 미국, 영국 등 자유민족 진영과 소련(러시아), 중국 등 공산사회 진영이 수십개국이 한반도에 총 출동한 세계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현 상황은 여러 가지 종전과 평화구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이다. 이렇게 볼 때 남한과 북한의 2개의 국가는 아직도 정상국가라기보다 분단된 ‘비정상국가’이다. 우리는 주요섭의 장편소설 『길』을 통해 앞으로 한반도의 ‘길’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깊이 사유해보아야 할 것이다.
--- 「책머리에」중에서
한 동안 쉴 새 없이 들이밀리는 부상병 취급에만 정신이 팔리어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일반 환자 병실을 순회하고 난 정헌이는 사무실로 돌아와 앉았다.
라디오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군가소리도 신경을 자극 하거니와 가끔 가다가 부상병이 아품을 못이겨 황소처럼 엉엉 웨치는 소리가 들려올 때에는 몸에 소름이 끼치고 간헐적으로 은은히 들려오는 포소리에도 가슴이 섬쩍섬쩍하여 공포심이라기보다도 질망감이 부지불식간에 전 신경을 좀먹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가 다 제각기 제 생각에 골몰하여 누구 하나 수작을 건네는 사람이 없는데 이비인후과 과장 대머리 의사가 그의 마도로스 파이프를 책상 구통이에 똑똑똑 뚜드리는 소리에도 모두가 필요 이상으로 놀라서 욕설을 막 퍼부은 사람도 있고 허허허허 하고 히스테릭하게 웃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 간호원 하나이머리를 쑥 들이더니,
“시체 보관실이 꽉 차버렷는데 새로 죽는 환자는 어떻게 할가요?”
하고 물으니 외과 과장이,
“당분간 신입 환자가 없으니 그냥 제자리에 두어두지오. 어떻게 하오! 설마 하루밤에 썩을라구.”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비로 이때 귀청을 찢는 듯하는 땅! 소리와 함께 창문들이 와들와들 떨고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부글부글 끌어오르는 것 같았다.
방안은 상당히 무더운데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몸을 모두 부르르 떨었다.
남자 간호원 하나이, 아니 정국이가 머리를 쑥 들이밀더니,
“괴뢰군이 창동 여촌을 이미 돌파하여서 서울 함락은 시간문제이랍니다.”
하고 반갑지 않은 보고를 하고 갔다.
--- p.61~62
전 하늘이 시뻘건 불꽃에 뒤더피어 하늘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는 광경을 넋을 잃고 서서 바라다보던 정학이는,
“욍”하는 소리를 듣자 질겁을하여 방공호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외욍꽝” “외욍꽝” 하는 소리뿐이 아니라 따따따따 하는 기관총 소리가 들리어 오게 되자 욱진이는 그냥 마루에서 주무시고 있는 어머니 안위가 염려되어 방공호 밖으로 나섰더니 더운 김이 그의 언굴에 확 끼치었다.
“에키, 불!”
하고 그는 부지중 소리를 버럭 질렀다.
욱진이는 마루로 뛰어올라가서 어머니를 질질 끌다싶이 하여 뜰 아래로 모시어놓고는 날쌔게 방공호로 달려가서 ‘다다미’를 번쩍 들어 내동댕이치고,
“야들아, 불이다, 불 엽집까지 불이 당기었다. 나오너라. 모두들, 어서어서.”
하고 소리질렀다.
정학이는 자는 아이들을 때려 깨워 일으켜서 하나씩 안아 내놓으면 욱진이는 방공호 지붕에 던 담요와 이불을 벗겨 머리에 씨워주면서,
“이건 그대루 쓰구 길로 나가거라. 사직 공원으로 가라.”
하고 말하였다.
순덕이는 애기를 둘러업고 방공호 밖으로 나서면서 머리 위에 이불이 씨워져서 한 팔로 애기를 업고 한팔로는 이불을 머리 위으로 들고 허둥지둥 대문 밖을 나섰다.
행길에는 사람들이 모두 이불을 쓰고 허둥지둥하기 때문에 그는 이리 치우고 저리 치우다가 문득 등 뒤가 허수룩해지는 것을 느끼자,
“아, 애기!”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불을 던져버리었다.
사방에서 붙는 불 때문에 길은 밝았으나 뒤를 돌아다보니 애기는 사람들 발에 짓밟힛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 애기야, 애기야”
하고 울부짖으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발을 동동 굴고 있노라니 저쪽 옆에서 누가 머리에 던 이불을 훌떡 벗기면서 순덕이쪽을 보는데 그는 정환이었고 그의 목에 애기가 목말을 타고 있는 것이 보이는 듯하자 금시 이불이 애기 몸을 도로 가리웠다.
--- p.328~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