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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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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0월 15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76쪽 | 352g | 128*190*15mm
ISBN13 9788960787094
ISBN10 8960787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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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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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치기(稚氣)

나의 유년기는 매우 지루했다. 동네 조무래기들과 어울려 노는 게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았다. 혼자서 떠가는 하늘의 구름을 보거나 마당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개미들의 꼬물꼬물한 행렬을 구경하며 놀았다. 파리의 사체 같은 게 있으면 개미들은 자기 덩치의 수십 배나 되는 그 거대한 물체를 힘을 합쳐 자신들의 아지트로 끌고 들어가곤 했다. 가끔은 개미들끼리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늘 개미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철둑에 가서 지나가는 기차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난 일과의 하나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책을 읽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동화책 같이 스토리가 있는 글이 재미있었다. 이웃에 사는 인숙이라는 외가 쪽 친척 누나가 집에 놀러 올 때가 가끔 있었다. 스무 살 정도 되는,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약간 저는 예쁜 누나였다. 그 누나가 오면 나는 내가 읽은 책의 스토리를 요약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숙 누나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끝에는 꼭 이렇게 말했다.
“넌 어쩜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니? 나중에 소설가가 되겠구나.”
소설가가 무엇인지 몰랐을 때였다. 한 2, 3년 그렇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누나는 서울로 시집을 가버렸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 장례식 때 그 누나가 문상을 왔길래 그 이야기를 했더니, 누나는 그 일을 기억도 못했다. 나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고 더군다나 자신이 그렇게 말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내 기억의 혼선인지도 모른다.
--- p.8-9

“억울하다. 억울해.”
어머니는 늘 억울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평범한 말이라도 같은 말을 여러 번 듣다보면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뭐가 그렇게 억울하세요? 아들이 못해드리는 것도 아니고, 못 먹고 못사는 것도 아니고. 식구들 다들 건강하게 살고 있고…”
“그게 아이라 카이. 다른 할매들은 다 돈도 받고, 국가유공자고. 나는 청춘에 혼자되어 딸랑 니 하나 보고… 내 심정을 니는 모린다.”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나도 50년을 더 살았다. 더군다나 문학을 전공했고, 평론 나부랭이를 쓰면서 인간의 궁극이 무엇인가를 꽤 열심히 탐구했다. 어머니가 왜 억울하다고 하는지도 잘 안다.
6·25 전쟁이 한창일 때 어머니는 시집을 갔다. 신혼 사흘 만에 군에 간 남편은 전사했다. 그 후 1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 지나가던 영감탱이에게 몸을 허락해 낳은 아이가 나다. 그 그 영감탱이가 나의 아버지다. 어머니와 영감탱이가 같이 산 날은 일생을 다 합쳐봐야 채 몇 달 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인생이 억울하지.
--- p.16

영감은 1899년생, 돼지띠다. 19세기의 마지막 해인 1899년은 대한제국 광무 3년으로 고종이 황제였고, 한반도 최초의 철도 노선인 경인선이 개통한 해다. 아동문학가 방정환이,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 내가 1961년에 태어났으니, 영감은 환갑이 지나서도 성적 능력의 발휘를 멈추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비아그라도 없었던 시대이니만큼 영감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추동력으로 나를 탄생시켰다.
나이로 보면 영감은 나의 할아버지뻘이었으므로 내가 좀 자라서도 영감의 대화상대로는 내가 너무 어렸던 모양이다. 영감의 말 중에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말을 했지만 내가 어릴 때여서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영감이 내게 한 말이 없었든지 둘 중 하나일 거다. 하지만 영감의 나를 바라보는 애매한 눈길은 생각난다. 자애로우면서도 안타까운 눈길. 귀여운 녀석, 이런 감정과 함께 현실적으로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 애비도 없이 살아갈 어린 아들의 수많은 날들이, 아니 안타까울 수 없었을 것이다.
--- p.79

아까시 꽃이 지고난 뒤, 첫 휴가는 아직도 먼 어느 날 나는 점심을 먹고 변소에 쪼그리고 앉아 배설을 즐기고 있었다. 봄철이면 가끔 철원 산악지대에는 맑은 날에도 돌풍이 불 때가 있다. 배설이 클라이맥스에 달하고 난 직후였다. 갑자기 윙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돌풍이 변소 주위를 몰아쳤다. 시멘트 블록 벽이 들썩거렸다. 다시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우당탕 소리가 나고 변소가 순식간에 환해졌다. 돌풍이 변소 지붕을 날려버린 것이다. 지붕이 있었던 사각형의 공간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눈을 들어 위를 보니 푸른 하늘에 눈부신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이게 남중이다. 태양과 하늘과 내 입과 내 몸의 내장과 항문이 지구의 구덩이와 일직선으로 놓이는 그 통쾌한 순간이 바로 남중이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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