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보게 호텔에 위치한 계획위원회 최초의 사무실에는 “근대화가 아니라면 쇠퇴”라는 표어가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급박한 표어는 계획위원회가 느낀 어떤 위기감을 반영한다. 조직화 운동에서 계획화 운동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은 “미지의 위기”라는 명명이 보여주듯이 보불전쟁 이후 계속되는 위기에 대한 집착에 근거하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을 제외하더라도 인구 감소와 퇴보, 알코올 중독, 매춘, 공산주의 혁명, 보나파르트주의의 귀환, 러시아와 독일의 부상, 유태인의 “음모” 등 프랑스는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누리면서도 끊임없는 불안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위기”들이 실재하는 종류의 것이었는지 여부는 당연히 논쟁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 “위기”들에 대한 대응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양한 사회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낸 것 역시 사실이다. 인구 감소에 대응한 가족주의적 복지국가의 형성과 생물학적·문화적 퇴보에 대응하는 우생학적 정책의 등장, 공산주의 세력의 강화에 대응하는 자본가들의 자기 수정 노력 등 프랑스 사회의 변화는 분명 “위기”들에 대한 사회적 대응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의 담론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 역시 지적할 필요가 있다. 위기는 필연적으로 적대화를 거친 사회 안팎의 타자를 상정하며 위기의 극복은 이들에 대한 교정 혹은 멸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기의 연쇄와 정상상태화는 이 시기 프랑스 사회정책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 p.43~44, 「1장 “미지의 위기」중에서
수리경제학파는 단순히 경제 연구에 수학을 적용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소련의 정치경제학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주는 여러 이론적 개념을 도입하고 개발했다. 따라서 이들의 사상을 둘러싼 논쟁과 그 논쟁을 돌파해 가는 과정은 단순히 학계 내의 이론적 논쟁의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주의 사회의 전반적인 관리체계 개혁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1950년대 이후 소련의 정치경제적 변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반드시 밝혀져야 하는 부분이다. 또한 이는 동서 냉전의 전개 과정에서 양 체제의 이질성을 넘어선 동질성 및 인식론적 유사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서 20세기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위한 냉전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다. --- p.50, 「2장 “1950년대 후반 이후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성장과 그 영향」중에서
식민지 조선에서의 농가경제조사는 조사의 목적과 조사에 필요한 행정능력의 편차에 따라 시기별로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 최종적인 귀결은 1930년대 식민지 농정을 규정한 자력갱생운동과 이에 연동된, 방금 앞에서 논의한 ‘농가개황조사(1933/1938)’였다. 이미 앞에서 한 차례 언급했지만, 이 ‘농가개황조사’와 갱생운동의 실질적인 방향을 결정지은 것은 1930~1933년에 걸쳐 진행된 조선농회의 조사였다. 조선은 일본과 달리 농가세대 내에 방대한 양의 잉여노동력이 잔존해 있기 때문에 임금노동을 지양하고 이를 모두 가족노동으로 벌충―농업노동의 탈시장화, 탈임노동화―하여 농가경제수지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이 조사 결과로 얻은 결론이었다. 가족세대원의 잉여노동력 투입을 통한 경영 집약화, 겸업을 통한 경영 다각화, 농가의 비자본주의적 자급자족으로 요약되는 갱생운동의 의제는 바로 이 조사의 결과를 통해 촉구된 사항들이었다. 조선 농가의 현실은 차야노프의 소농경제론에 따라, 가족세대원의 추가 노동단위를 투입하여 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여지가 여전히 대단히 큰 것으로 평가되었다. --- p.107~108, 「3장 “제국?식민지 농가경제조사의 지적 계보와 그 정치적 의미」중에서
1954년 컨퍼런스는 국제정치 이론이 체계적 학문 분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 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첫째, 현대 학문 분과의 확립, 체계적 이론의 수립에 기업의 재정적·제도적 지원이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문체계와 이론이 단순히 학문 내의 독자적인 논쟁 과정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심과 관점을 가진 기업의 영향력을 통해 제도화될 수 있다는 것은 학문의 자율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록펠러 재단의 주요한 역할은 단순히 체계적 이론과 학문 분야의 성립을 지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면서 실증 연구, 이론, 방법론에서 매우 협소한 지적 스펙트럼의 발전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컨퍼런스에서도 확인되듯이 재단과 관료들이 학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현실에 적용 가능한 실용주의적 이론이었다. 이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현실의 정치적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는 학문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학문의 정립과 발전 과정에서 학계 자체의 역량보다 기업의 후원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 p.137~138, 「4장“냉전기 국제정치 이론의 발전」중에서
과학 진흥이 현대 국가의 경제 문제, 인민 복리 향상의 문제와 직결되면서 인민공화국의 과학 진흥은 국가가 앞장서서 추진해야 하는 국가적인 사업이 되었다. 즉, 과학 실험은 “강대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기초”였다. 1950년대 이후 중국의 과학기술 사업은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신속하게 발전했고 많은 성취를 일궈냈다. 첸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생각은 중국처럼 과학기술과 공업 기초가 박약한 국가가 비교적 단시일 내에 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실현하여 먼저 앞서가 있는 세계 수준을 따라잡으려고 한다면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계획적·조직적으로 과학기술 작업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화·조직화의 일차적인 목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급진적이면서도 또한 전문적인”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언사나 행보에서 간취(看取)할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급진적인 과학기술 인력보다는 전문적인 과학 인력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 p.154, 「5장“첸쉐썬의 과학기술론과 사회발전론」중에서
각종 통계표와 도표의 표제, 열두, 단두, 눈금은 물론 모든 통계간행물을 영역하고 현재의 영문은 개량하며 고유명사의 영문 표기를 모두 통일시켜야 한다는 이 같은 주한통계고문단의 요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종의 타자적 공간으로서 제3세계의 인식 불가능한 대상을 인식 가능한 공간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가독성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읽히는 대상으로서의 타자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서구 사회에 자신의 가독성을 높임으로써, 한국이 열망하는 것을 원조받을 수 있으며 읽는 주체인 서구와의 동시대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한국이 “국제적 통계사회에 참가할 야망”을 실현시키고 “국제과학공동사회”의 “구성원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통계전문가와 통계기관 자체의 통계적 업적과 성숙” 외에 다른 지름길이나 간단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p.186, 「6장“1960년대 한국의 통계 발전과 사회에 대한 통계적 지식의 부상」중에서
포트폴리오 선택이라는 새로운 이론은 당시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들이 사용해 온 이른바 ‘증권 분석’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특히 리스크를 적극적으로 투자 결정 이론에 반영하는 것은 당시의 규범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리스크와 수익의 관계가 그 핵심이었고 기업의 다양한 정보보다는 증권들의 상관관계가 중요했다. 나아가 새로운 이론은 투자와 투기를 ‘효율성’을 기준으로 구분했다. 비효율적인 포트폴리오는 “더 높은 기대 (혹은 평균) 수익을 더 큰 변동성 없이 얻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낮은 평균 혹은 기대수익 없이 더욱 높은 수준의 수익을 확신하는” 효율적 투자선을 벗어나는 것이다. 마코위츠에게 투기는 인간의 욕심이나 대중 심리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증권의 비효율적인 배치일 뿐이었다.
새로운 투자 이론은 증권 분석의 창시자이자 워런 버핏의 스승으로 알려진 그레이엄(B. Graham)의 주식시장론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변덕스러운 대중의 심리를 따르는 미스터 마켓(Mr. Market)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었다. 마코위츠는 주식시장의 변덕을 증권 수익의 변동으로 환원했고 인간의 현명한 판단을 합리적 인간의 냉철한 계산으로 대체했다.
--- p.208~209, 「7장“‘과학적’ 투자 담론의 냉전적 기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