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세계에서 발생한 시위는 서구 언론에 의해 유럽의 시민혁명과 비견(G肩)되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빵과 굶주림의 혁명이라는 단순하고 획일화된 평가에서부터, 유럽식 민주주의 발전과정이 아랍 세계에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어린 시선, 그리고 종교적 가치를 중시하기에 서구식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할것이라는 부정적 전망까지, 실로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면서 2011년 전 세계인의 관심과 주목을 끌었다. --- p.23
이집트의 시민혁명이 성공했다. 정권이 교체되었고 자유와 평등을 가치로 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많은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가 실질적으로 자유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슬람과 정치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데는 적지 않은 역경이 따를 것이다. --- p.51
이집트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 al-Ikhwan al-Muslimin)은 아랍 이슬람 세계에 등장한 현대 이슬람원리주의 시민운동의 이념적·조직적 진원지로 간주되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은 1928년 하산 알-반
나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90년 이상 반복되었던 이집트의 정치적 역경과 이념적 논쟁 그리고 내부 분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가말 압두 알-나세르 시기의 위상 정립과 가치체계 수립 과정을 겪은 후 1970년대 사다트 대통령 집권 이래 이집트 종교와 정치 운동의 주류로서 자리매김을 하였다. --- p.79
1990년 전격적인 남북통일로 전 세계, 특히 한국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근대사의 무대로 복귀한 예멘은 21세기에 세계화와 그에 따른질서 변화 속에서 민주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알-카에다(Al-Qaeda)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출생지로 알려지면서 예멘은 테러와 납치로 유명해졌고, 남북예멘을 통일한 알리 압드 알라 살레(Ali Abd Allah Saleh) 대통령의 33년 통치는 장기집권과 독재정권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예멘은 지금 이 시각에도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다. --- p.123
리비아는 인구 640만 명의 절대 다수가 순니 무슬림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이다. …… 리비아는 이슬람화된 아랍과 터키의 지배를 거쳐, 오스만 터키 제국이 약화된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 독립국이 되었지만 미국과 영국의 군사기지 사용 대가로 보조금 및 군사원조를 받는 등 경제적 종속은 지속되었고 정치적 혼란도 끊이지 않았다. 1955년~56년 간 미국에 석유 탐사권을 부여했고, 1960년 7월 초에는 35개 유전이 개발되었다. 이에 따라 재정 독립 및 적극적인 외교 전개 기반이 형성되어 갔다. --- p.153
2011년 2월 초, 튀니지의 벤 알리는 권좌에서 쫓겨나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을 떠나 있었고, 이집트의 무바라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마지막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 시리아에서는 야권이 주동하여 ‘분노의 날’을 기획하고 시위를 촉구하고 나섰다. 전 세계 언론의 호기심 어린 관심 속에서 디데이는 다가 왔지만, 수도 다마스쿠스의 집결지에는 시위대 대신 보안요원들과 기자들만이 자리를 메웠다.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분노의 날’은 시리아가 여타 아랍 국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었다. 실로 시리아 아사드 정권은 ‘좋은 정권’은 아니었지만‘강력하고 안정적인 정권’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 p.183
그동안 교착상태에 빠졌던 이-팔 평화는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 돌파구가 열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건강보험개혁 등 국내 문제로 이-팔 평화협상에 소극적이었다. 미국은 2010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직접 협상을 재개했지만 협상은 별 진전을 보지 못했다. 베냐민 네탄야후 총리의 이스라엘 정부는 미국의 중재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 p.221
2011년 7월 9일 이전에 수단(Sudan)은 중동 아프리카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국가였으나 이제는 남수단이 독립함으로써 그 자리를 알제리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 땅이 넓고 부족이 많다 보니 언어도 다양하다. 1982년 필자가 수단에서 유학하고 있던 시기 어느 날 국영 텔레비전에서 국회에서 열리는 회의를 보았는데, 여러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의원들이 각기 자신의 부족어로 말하면 이를 영어나 아랍어로 다시 통역을 하는 것이었다. 또 영어나 아랍어는 다시 여러 부족어로 통역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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