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엔젤」
유방암 진단을 받고 죽음의 공포를 떨치지 못하던 나는 수술대 위에서 마취와 함께 의식을 잃는다. 무의식에 세계에서 희망의 천사 블루엔젤이 나타나 내가 어떤 경험과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러 방을 통해 자각시키고 보여준다. 귀가 달린 방과 귀머거리 방, 신사의 방, 아마조네스의 방, 주검의 방,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나는 블루엔젤이 이끄는 대로 천국과 죽음, 신에 관한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수많은 방을 헤맨다.
「달맞이꽃」
간호사인 유진은 남편과 아이 둘과 함께 뉴욕에서 살고 있다. 어느 날 남편이 맨해튼 뒷골목에서 총살당하고 안치실에서 남편의 시신을 확인한 뒤로 유진은 불면증에 시달린다. 술에 기대 하루하루 살던 유진은 어느 날 우연히 서랍 밑바닥에서 묵은 일기장을 발견하고는 첫사랑 민우를 떠올린다. 뉴욕에서의 생활이 자신의 거짓 위에 세워진 초라한 무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화가 나 우는 유진을 달래주는 딸을 보며, 유진은 자기 자신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하고 고향을 찾는다.
「낙원 불가마」
사람 타는 냄새로 ‘힌놈 계곡’의 불이 꺼지지 않듯이 낙원 불가마에도 사람의 살냄새와 땀 냄새로 700도의 불가마 열은 식지 않는다. 낙원, 파라다이스, 에덴동산은 인류가 본향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는 곳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풍요와 환희의 에덴동산은 없다. 그러나 지옥 같은 낙원 불가마에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약동의 소리가 들린다. 희미한 신음소리,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 초침 소리, 심장박동 소리……. 모두들 소리에 귀를 맡기고 낙원을 꿈꾼다. 실면도사인 나는 도피처요, 생활의 터전이었던 지하세계인 ‘낙원 불가마’에서 탈출하여 마지막 황제 푸이처럼 지상에서의 정원사가 되기를 꿈꾼다.
「창」
수애의 아버지는 아들을 얻기 위해 첩까지 두었으나 실패하고, 결국 양자로 들인 오빠마저 계대와 살림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수애는 한의원을 하는 수애의 집에서 일하던 10살 연상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런 집안에서 수애와 일꾼의 사랑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리 없어 둘은 결별하게 된다. 그가 ‘상거래’ 같은 결혼을 하고 연락이 끊어지자 수애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긴 세월 뒤 남편과 사별한 수애는 뉴스에서 신정아 학력위조 사건을 듣는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터넷에서 신정아의 연서를 검색하던 수애의 눈에 연서 속의 구스타프 클림프의 ‘키스’가 들어온다.
「열병기」
신문에 고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의 범인이 체육교사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 기사를 본 후 의심 없이 살아온 내 인생에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살인범은 아닐지라도 과연 나는 천직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내 직업이 생활의 방편에 더 큰 비중을 두지 않았을까? 의문과 회의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열병을 앓던 소년 시절로 빠져들어 간다. 중학교 2학년, 서울에서 국어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예쁘고 세련된 옷맵시에 눈동자가 까맣고 눈매가 곱던 차지예 선생님.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고전경시대회에서 개인 최우수상을 받은 나에게 차 선생님이 해준 칭찬의 감동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내가 어려울 때 힘이 되었다. 그러나 동네 청년들과 체육 선생님은 차 선생님을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용태와 억만이, 순이가 한 조가 되어 차 선생님을 향교가 있는 교동에 안내하게 되었다. 12월 24일에 있을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 교사들의 찬성을 강요하기 위한 파견이었다. 그러나 차 선생님은 유신헌법에 관한 이야기는 빼고 자식들의 교육에 관한 이야기만 하다가 이장에게 쫓기다시피 그 자리를 떠난다.
「물떼새의 기별」
수라는 암 선고를 받고 수술받기 전 남편과 별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일 중독인 부부는 결혼 후 19년 동안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 때문에 병이 생긴 것 같아 수라는 생활을 단순화시키려고 한다. 부부는 별장으로 가는 길에 탱크로리의 앞바퀴에 깔려 구겨진 겨자색 승용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표정하게 서로를 바라보곤 그런 행동이 의외라고 느껴질 정도로 두 사람의 의식은 동떨어져 있다. 각각의 상상 속에서 남편 희모는 아내가 죽은 후 신방을 꾸리는 상상을 하고 수라는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한다. 별장에 도착한 후 정자에서 희모는 육체적 욕망을 느끼고 수라는 자신의 꺼져가는 육체의 불길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긁어모으고 무엇이든 받아들여 이용하려고 한다. 잠시 후, 수라의 언니 수미가 남편과 함께 별장에 도착하고, 두 쌍의 부부는 바닷가로 내려간다.
「좋은 하루 되세요.」
모니카는 이스라엘인과 결혼하여 이스라엘에서 한국인의 성지순례를 안내하는 현지 가이드다. 일주일간 집을 떠나 한국인 순례객들을 안내하게 되었다. 쓸쓸해하는 남편이 마음에 걸렸지만, 남편의 애정에도 타국에서 늘 고독했던 모니카는 테러 때문에 1년 만에야 만나게 되는 한국인들 생각에 들떠있었다. 한국인들을 안내하던 모니카는 이스라엘 성지를 순회하는 순례객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동생, 남편과의 첫 만남을 추억한다. 그러다 우연히 성모영보 기념성당 앞뜰에서 외국인을 안내하는 남편을 만나게 된다.
「새를 키우다」
유방암 수술 후 항암주사 때문에 메스꺼움과 구토가 멈추질 않는다. 생활의 변화를 시도하며 잘 견디던 것도 잠시, 다시금 무력해지는 나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예술치료를 받으러 갔다. 선생님을 포함한 10명의 사람들은 모두 인디언의 이름처럼 별칭을 짓는다. 현재의 힘을 얻기 위해서 나의 밑거름이요 이성의 휴식시간이었던 유년시절의 놀이를 한다. 그러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진실을 알 수 없듯이 중년이 된 우리들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삼팔선 넘기보다 어렵다. 나의 몸과 마음은 소리굽쇠가 되어 내면의 소리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상대방의 소리를 듣는 훈련부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