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1980년대는 저항의 시대였다. 그 서막은 ‘서울의 봄’이었고 거기에서 자란 힘은 뒤이어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치솟았다. 민주·정의를 지켜내기 위한 이 항쟁에서 신군부가 시민에 대해 자행한 폭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저항하는 학생들은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고, 그중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한 자도 적지 않다. 분노한 젊은이들이 자결의 긴 대열을 이루었다. 5·18항쟁의 유가족과 부상자 등 피해자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싸움을 이어나갔다. --- p.13
살아남은 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먼저 죽어간 열사들의 그림자에 휩싸였고 그 영혼의 부름 앞에 죄책감으로 전율했다. 그들의 장렬한 희생과 그에 대한 부채의식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결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었다. 금단의 구역이 된 망월동 묘지를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이곳저곳 맴돌며 서성이던 젊은이들이 바로 그들이었고, 그들이 그날 이후 오늘까지 계속되어온 5월운동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27일의 위대한 패배가 이후의 저항운동에 온몸을 바쳐 싸우게 한 힘의 원천이었고, 앞날의 운동에 동력을 만들어내는 효소였음을 우리는 다음에서 소개하는 5월운동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싸움에서 지더라도 어떻게 지느냐, 즉 패배의 방식을 강조했던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통찰을 5월운동에서 다시 발견할 것이다. --- p.42
항쟁은 끝났어도 상처는 남아 있었다. 오히려 더 무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상처가 깊어감에 따라 더 큰 아픔이 되었다. 더 괴롭고 더 힘든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이중, 삼중의 싸움이었다. 깊어가는 부상과의 싸움, 약해지는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냉혹한 국가권력과의 싸움이 그것이다. 곁에 있는 가족의 삶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부상자를 간병해야 하고, 무거워지는 치료비를 감당해야 하며, 먹고살아 나가야 할 방책도 마련해야 했다. 이것은 항쟁보다 더 외롭고 오래 걸리는 싸움이었다. 입원이 가능한 사람은 병원에서, 입원할 수도 없는 사람은 집에서 이 싸움을 지속했다. 아무리 약하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 p.97
1988년의 추모행사는 항쟁이 좌절되었던 1980년 이후 8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폭도의 난동’은 이제 ‘민주화운동’으로 정당화되었고,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며, 다양한 지원대책도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광주항쟁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이전에는 감시와 수난 속에 숨은 채 소규모로 치러졌던 추모제가 이제는 당당하게 정부의 승인과 지원 속에 대규모 축제로 거행되었다. 분노와 한에 목이 멘 흐느낌 속에 치러졌던 추모제가 이제는 명예로운 역사에 대한 기념과 축제의 한마당으로 바뀌었다. --- pp.151~152
광주항쟁 이후 1980년 한국 사회에서 전개된 사회운동, 특히 민주화운동의 전체적 흐름에서 5월운동은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고, 각 부문운동과 유기적 관계하에서 중요한 자극과 동력을 주고받으며 병행하여 또는 중첩적으로 진전되어왔다. 매년 5월이 오면 전국의 학생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 문화운동 등 각 부문운동이 5월운동에 결합하여 그 힘을 강화함으로써 5월운동의 효과를 극대화해왔다. 운동권 전체가 다양한 형태로 5·18을 매개로 하여 결합됨으로써 전국적으로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곤 했다. --- p.264
1987년의 6월항쟁은 1988년의 5월행사를 혁명축제로 비약시켰다. 그 이전에는 추모제의 형태로 단순하게 거행되던 5월행사가 이제는 10만 군중이 참여하여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축제로 질적 변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 계엄군의 폭력에 쓰러져 실려 가는 시민을 보고 나서 너와 나를 구별하는 경계가 소멸되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그 학살 만행에 분노하고 싸웠던 기억들, 시민의 총동원과 무장투쟁으로 계엄군을 몰아내고 난 후에 매일 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던 시민궐기대회에 관한 기억들, 그리고 퇴각했던 계엄군이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쳐들어올 때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도청을 지키며 싸우다 희생된 동지들에 대한 기억들이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것이었다. --- p.309
5월운동이 학살만행에 대한 저항운동이고 운동의 대상이 학살자라는 인식은 이에 대한 대응방식도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제한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다수의 양민을 학살한 범죄자의 책임은 무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저항과 도전의 대상이 막강하고 제도화된 폭력을 독점한 국가권력이라고 하더라도 5월운동의 주체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범죄자이고 가해자라는 점에서 운동은 매우 과격하고 치열한 과정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폭도로 낙인찍혀 왜곡된 자아정체성’과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및 부채의식’은 저항의 원동력으로 상호 간에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용납할 수 없는 왜곡된 현실과 먼저 죽어간 동지가 보내는 침묵의 명령으로 인해 이들은 5월운동에 투신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정신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 p.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