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들어갈 작품을 추려내기 위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글들을 모두 꺼내 보게 되었다. 문서함 안에는 완성된 작품과 쓰다 만 글들이 가나다순으로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완성된 작품들만 골라 하나씩 다시 읽는 동안 과거의 순간들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글을 쓰던 순간의 나 자신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의 목적도 잊은 채 내가 쓴 소설을 통해 과거의 나를 만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글을 쓰던 순간에는 나와는 상관없는, 가공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제3자의 눈으로 되돌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소설 안에 그 글을 쓰던 당시의 내 모습이 부분적으로라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소설에는 이전의 소설을 쓰던 나와 조금 달라진 모습의 내가 들어 있었다. 생래적으로 생의 에너지가 부족했던 내가 작품을 하나씩 완성해 나가면서 조금씩 내면의 힘과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 작품 속의 인물들과 고군분투하다 그렇게 된 측면이 더욱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상을 고통스럽게 느끼는 딱 그만큼, 내 인물들도 고통과 고난을 겪고 있었고, 내 인물들이 분투 끝에 곤경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나 또한 곤경을 극복하고 있었으니까. 소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 「책머리에」중에서
『리만의 기하학』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렀다. 이제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시간이 정지된다면 모를까 더 이상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정지된다, 시간이…… 암전 상태의 머릿속에 불이 켜지듯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시간을 현재 이 시점에 묶어두고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이 허무맹랑한 상황이 더 부풀려지는 것을 막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베레조프스키와 박영한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내가 겪은 현실을 바탕으로 나의 이야기를 쓰되 지금 이 순간에서 이야기를 멈추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상황과 시간을 무한의 고리 안에 가둬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 또한 영원히 이 순간에 멈춘 채 시간의 고리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곧 김 실장의 소름 끼치는 전화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영원히 이 시간 안에 갇혀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애써 외면하며, 『리만의 기하학』의 비어있는 여백을 찾아 페이지를 넘겼다. 내가 글을 다 쓴 다음에도 『리만의 기하학』 원본에 다른 이야기를 써 넣을 수 있는 여백이 남기를 간절히 바라며 펜을 찾아 들었다. 남은 여백에 써 넣을 새로운 이야기는 박영한과 내가 시간의 무한 고리에서 빠져나가는 내용이 될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펜을 놀려 『리만의 기하학』 여백에 글을 써 넣기 시작했다.
--- p.62~63
허둥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논리적이면서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내가 만약 김사강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고, 주랑과 나의 만남이 김사강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소설을 위한 구상이었다고 가정한다면, 김사강의 소설은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재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이 논리에 의한다면 그녀에게 가는 길이 사라지고 주랑의 존재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됐다. 김사강은 나와 주랑이 등장하는 소설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나의 생각들을 K 박사에게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소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를 새롭게 다시 쓰기로 작정했다. 소설을 씀으로써 내 앞에서 사라져간 것들이 되돌아오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노트북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하나둘 문장을 써내려갔다.
--- p.2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