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이 훨씬 지나서까지 수호는 일에 매달렸다. 양복을 벗어 던지고 단색의 넥타이를 약간 느슨하게 하며 서류를 넘기다가 시계가 여덟 시를 가리키는 걸 보았다. 그러다 무심코 앞에 있는 미니 달력에 눈길이 갔을 때 거기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친 날짜에 시선이 멈추었다.
6월 10일! 오늘!
“이런!”
아내의 생일이었다. 그가 눈을 잔뜩 찡그렸다. 올해만은 잊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혼 생활 사 년 동안 그는 부인의 생일을 제때 기억해서 축하한 적이 없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서 값비싼 선물을 안겨줬지만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에 그늘만 더할 뿐이었다.
“아직 오늘이 가려면 네 시간은 남았군.”
서둘렀다. 항상 단정했던 수호는 옷을 추스를 새도 없이 회사에서 나와 단골 금은방에서 주인의 권유로 다이아가 박힌 목걸이를 사서 음미할 새도 없이 포장한 후 장미꽃 한 다발도 손에 들고 집으로 갔다. 어둠이 깊숙이 내린 아담한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가자 아줌마가 충실한 얼굴로 맞이했다.
“집사람은요?”
“모임 때문에 늦으신다고 전화 왔습니다.”
“알았으니 들어가 쉬세요.”
손에 쥐고 있는 장미꽃이 창피스럽다는 생각이 스치자 그의 음성은 덜컹거렸다.
“네. 쉬세요.”
아줌마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너무 퉁명했나 하는 생각이 뒤따른다. 일을 야무지게 하면서 말수도 적어 말도 옮기지 않는 좋은 아줌마인데……. 또 버릇 도지는군. 김수호는 사람들에게 먼저 상처를 내고 또 너무 쉽게 혼자 후회한다. 그는 꽃다발을 든 손을 내린 채 계단으로 올라가 아내의 방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집에서 아내의 공간과 그의 영역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졌다. 바쁜 그가 왼쪽 서재에서 밤새는 일이 많아지자 자연스럽게 아내 역시 그들의 침실이 아닌 반대 방향 끝에 있는 작은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수호는 아내의 방 앞에서 손님인 양 멈칫하다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보랏빛 화장대에 꽃다발과 보석함을 두고 의자에 앉아 잠시 아내의 체취가 묻어 있는 물건들을 낯선 시선으로 스치며 지나갔다.
연한 핑크색 벽지가 오히려 화사하기보다 여기서 혼자 있을 아내가 떠올라 안쓰러웠다. 한쪽에 있는 작은 침대와 조그마한 책상이 간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의 눈이 방 안을 떠돌다 화장대 앞에 놓인 아내의 사진에서 멈추었다.
갸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동자와 오뚝한 코, 그리고 도톰한 입술을 가진 여자가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아내는 아름답고 빛이 나는 여자였다. 흠 잡을 데 없는 고상한 태도와 좋은 심성까지 가진, 그러고 보면 그는 운이 좋았다. 어찌 보면 음울한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여자라서 어머니의 의지와 고집이 아니면 맺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탐낼 만큼 집안으로나 그녀 자체로나 완벽한 이가 최이연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 전에도 오랜 만남 없이 혼인했다. 친분이 없어도 좁은 세계에 살다보니 같은 학교 출신도 많고 유학 가는 곳도 한정되어 있어서 얼굴과 이름 정도는 대부분 다 알지만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연애다운 연애는 하지 못했다. 지금보다 덜하긴 했지만 그때도 일에 미쳐 있어 이연을 즐겁게 해주지 못했는데도 그녀는 만날 때마다 의례 그 환한 웃음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그 웃음을 본 기억이 없다.
‘당신 혼자 아파하지 말라구요. 난 남이 아니라 아내잖아요.’
‘아픈 적 없어.’
‘내가 위로하게 해줘요. 나한테 기대요. 회사도, 정 그러면 독립해요. 내가 우리 집에서…….’
‘돈은 나도 있어. 그 얘기 이미 끝났잖아. 했던 말 또 하게 하지 마. 할 일 많아, 먼저 자.’
말로 수없이 밀쳤지만 몇 달 전 크게 싸운 후 그녀는 완전히 웃음을 잃었다. 모든 게 다 자신의 잘못이다. 자신의 아픔을 감싸려는 이연이 싫었다. 그 아픔을 이기고 나서 만나야 했는데……. 남을 행복하게 해줄 줄도 모르고, 그런 경험도 전무한 그가 환한 아내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따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생일 축하해, 그리고 미안해.”
수호가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손끝이 사진 속 아내의 얼굴을 더듬었다. 후회가 마음을 두들긴다. 그러나 김수호는 달릴 줄만 알지 걸을 줄 모른다. 그의 쌍꺼풀 지지 않은 새까만 눈이 멈추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슬픈 아내의 마음이 느껴져 환한 미소를 짓는 사진에서 떠나질 못한다. 저 미소를 왜 지켜주지 못했을까? 다시 찾게 해줄 수 있을까? 그의 손이 답을 찾으려는 듯 계속 작은 유리 액자에 갇힌 사진을 만지작거리다 잘못 건드렸는지 유리가 사진과 분리되었다.
아내의 사진이 뚝 떨어지면서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조그만 사진 한 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뒤집혀져 있어 누구인지 모를 그 사진을 별다른 호기심 없이 집어 들었다. 그러나 사진 속의 남자 얼굴이 수호의 검은 눈동자에 인식되었을 때 그의 동작은 거기서 정지되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심히 복잡해져 갔다.
‘장. 우. 현.’
장우현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전교 회장이었고, 못하는 운동도 없던 선생들의 이상형인 그. 사회에 나가서는 제 아버지의 바람을 그 이상으로 충족시키는 자랑스러운 존재, 불의의 사고로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죽은 형의 빈자리를 채울 만큼 모든 것을 다 갖춘 대단한 놈이었다. 아버지, 김인산이 드러내 놓고 부러워할 정도로 장우현은 완벽이란 단어에 닮아가고, 그 정의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그의 마음속을 헛되이 채우는 대상이 손에 닿아선 안 되는 인물이란 걸 제외하면 그는 완전하다.
전혀 친하지 않으면서도 김수호는 장우현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비밀까지.
자신보다 7센티미터나 큰 185센티미터에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뭐든지 척척 해내는 장우현과 어울리지 않았었다. 수호는 키에 대한 열등감이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190센티미터에 가까운 형과 184센티미터인 동생과는 달리 그는 178센티미터이다. 어머니가 태중에서 자신을 저주하며 거의 먹지 않아서 작게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랑받지 못한 생명은 그럴수록 무섭고도 질기게 견뎌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체질로 관심 없이도 건강하게 자라났다. 하지만 키는 다른 형제들만큼 크지 않았다. 178센티미터가 큰 키에 속함에도 상대적인 비교 때문에 그는 억눌려 있었다. 그런 그가 장우현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임해승이 수호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술 취한 장우현에 의해 그가 형수를 마음속으로만 오랫동안 사랑하고 있음을 해승이 유일하게 알게 되어 비밀로 남겨졌을 때 그 비밀을 영혼의 친구인 김수호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런 장우현의 사진이, 그것도 아내의 사진 뒤에 왜 숨겨져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사진에는 왜 아내의 향수 냄새가 잔뜩 배어 있는 거지?
수호가 장우현의 사진을 몇 번 튕기며 손가락에서 왔다 갔다 하게 하니 그 작은 것이 오락가락하며 흔들린다. 그의 눈동자는 번지듯 뚫어지게 사진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그때 전화가 울렸다. 2번, 4번, 6번. 끊어지고 다시 이어진다. 3번, 5번, 7번. 아내의 이름이 뜨는 걸 수호는 보면서도 가만히 있다가 한참 뒤에야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다, 당신이에요?
흔들리는, 죄 묻은 아내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수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응.”
- 오늘 고모가, 아파서……모,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얼마나 편찮으신데?”
- 심한……심한 것 아니고, 몸사……몸살이라서.
“그래. 잘 간호해 드려요.”
- 고마워요. 그럼 들어가요.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너무도 무거워 이연은 전화를 끊지 못했다.
“이연아!”
결혼한 뒤로 수호가 처음으로 부른 그녀의 이름이었다.
- 네?
“생일 축하해.”
- …….
당일 축하는 처음이었다. 수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수화기를 손에서 툭 놓아버렸다.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