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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정 | 가하 | 2012년 11월 0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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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2년 11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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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0.98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17.5만자, 약 5.7만 단어, A4 약 110쪽?
ISBN13 978896647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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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유현은 자기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혜선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그녀의 볼이 발그레한 이유가 갓 샤워하고 나와서라고 생각했는데,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얼굴이 빨간 걸 보니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초여름이라지만 해도 떨어진 후에 비를 너무 오래 맞았다. 유현이 손을 뻗어 이마를 짚자 갑자기 혜선의 얼굴의 홍조가 한층 더 짙어졌다. 진짜 열이 있는 모양이라고 유현은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아플 때 유리가 가끔 혜선이 네 얘길 했었어.”
불쑥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유현은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여동생이 죽은 후로 지금껏 누구에게 유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유일한 친구인 현재 역시 절대 유리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유현이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왜?”
“기억나는지 모르겠지만, 은혜원에 있을 때 한 번은 유리가 감기몸살에 제대로 걸렸어. 그때 네가 조퇴까지 하고 간호해줬잖아. 원장 선생님한테 혼나 가면서까지. 유리가 그 얘기를 아플 때마다 두고두고 했었어. ‘혜선 언니가 머리에 물수건도 얹어 주고 귤도 사다 줬었는데’ 하고. 은근히 샘나데, 오빠인 내가 옆에 있는데.”
“그래…… 기억이 나.”
겨우 울음을 멈춘 혜선의 눈에 또다시 맑은 물이 차올랐다. 유현은 저도 모르게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유리의 죽음으로 입은 가슴 속 상처에는 벌써 단단히 세월의 딱지가 앉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여동생의 죽음을 슬퍼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유현을 눈물겹게 했다.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착했던 그 시절의 유리를 기억하는 사람. 유현이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좋아했던 소녀가 동생을 추억하면서 눈물을 흘려주고 있었다.
유현은 위로 대신 말없이 혜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혜선이 벽이 허물어지듯 기대 왔다. 유현의 가슴이, 이윽고 그녀의 눈물에 젖어 서서히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 뜨거움이 온 몸에 퍼져 머리끝까지 닿는 순간, 유현은 정수리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신경이 쓰이고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이현준을 보고 웃을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나는 이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유현은 몸을 떨었다. 같은 여자를 두 번 좋아하게 된 사실에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그 무엇을 느꼈다.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자의 짧지만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는 조용히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깨닫고 있었다.

“어이쿠.”
불에 데기라도 한 듯이 호들갑스럽게 깜짝 놀라며 혜선의 이마에 얹었던 손을 확 뗀 유현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이마에다 달걀 부쳐 먹어도 되겠는데?”
“달걀 부치기 전에 내 단백질이 굳어서 죽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열 때문일까, 아니면 아까 먹은 감기약 때문일까. 혜선이 눈을 감은 채 꿈결을 헤매듯 몽롱한 정신으로 대꾸하자 차가운 것이 이마에 살며시 얹혔다.
“말하는 거 보니까 죽진 않겠네.”
차가운 물수건이 얹히자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혜선이 가늘게 실눈을 뜨자 유현이 침대 머리맡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있었다.
“선생님한테는 내가 전화 드렸어. 나하고 같이 있다니까 목소리가 밝아지는 게, 어젯밤에 혜선이 네가 집에 안 들어와서 많이 걱정하셨던 모양이야.”
그럴 리가. 안 가겠다고 발버둥을 치긴 했지만, 때마침 나타난 유현이 강제로 데려와 주지 않았던들 자신은 십중팔구 바깥에서 그 비를 다 맞고 꼬박 밤을 새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던 적도 있었다. 다행히 맑은 날이었지만.
유현이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뭐가?”
“선생님이 나보고 우리 혜선이 책임지라고 하시면 어쩌지?”
“꿈 깨세요.”
“아니,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남자 집에서 외박을 했는데 언니가 가만히 있겠어?”
“내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혜선이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대꾸하는데 갑자기 입술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깜짝 놀라서 눈을 뜨자 유현이 귤을 까서 입술에 대 주고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 순순히 입을 열어 받아먹자 남자의 눈이 흡족한 듯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반대로 혜선의 눈은 한없이 찡그려졌다. 참다못해 ‘아휴!’하고 비명을 지르는 혜선을 보고 유현의 발밑에 웅크리고 있던 작은 고양이가 낮게 울었다. 냐아옹!
“이거 너무너무 시잖아!”
“제철이 아니니 어쩔 수 있나? 이것도 비싸게 주고 사온 거니까 얌전히 먹어.”
유현은 잔말 말라는 듯이 또다시 귤 조각을 떼어 내밀었다. 혜선이 망설이자,
“어허. 이게 다 비타민 C라니까?”
하고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까지 놓는 것이었다.
혜선은 마지못해 또 받아먹으면서도 너무 신 나머지 한 쪽 눈이 자꾸만 저절로 감겼다. 어미 새에게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계속해서 받아먹자 남자는 점점 더 기쁜 듯한 표정을 했다. 그것이 부끄러워서 혜선은 괜히 시비를 걸었다.
“되게 능글능글해진 거 알아?”
“누가? 내가?”
“그래. 옛날엔 안 이랬는데.”
“옛날에는 어땠는데?”
“훨씬 더 조용하고…… 무게가 있었다고 해야 되나? 지금은 나이를 거꾸로 먹은 것 같아.”
문득 유현이 물끄러미 바라보아 왔다. 꼭 다물린 입술, 진지한 눈빛. 꼭 옛날의 그 소년이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혜선은 숨을 멈췄다.
“……나 좋아했구나?”
내가 말을 말지.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변한 거야? 혜선은 유현을 흘겨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이 일부러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유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편히 쉬어. 일단 푹 쉬고 열부터 내려야지.”
그렇게 말하며 유현은 손을 뻗어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려 고쳐 덮어 주었다.
“더워도 걷어차면 안 돼. 땀을 내야 열이 내리니까.”
“……고마워.”
혜선은 감기에 걸려 있었다. 아무리 초여름이라지만, 해도 떨어진 후에 비를 너무 오래 맞은 모양이었다. 어제 저녁에 흠뻑 젖어서 유현의 집에 온 후 샤워를 했을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유리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울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갑자기 열이 펄펄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데다 몸에 힘이라곤 한 조각도 들어가지 않으니 집에는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앓아누워 버린 혜선을 유현은 세심하게 보살펴 주고 있었다.
“그만 말하고 어서 자.”
곁에서 내려다보는 따뜻한 눈빛을 느끼며, 혜선은 눈을 감은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집, 그것도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누워 있으면서도 왜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지 몰랐다.
지금껏 아플 때 누군가가 이렇게 곁에서 시중을 들어 준 적이 있었던가? 은혜원 때부터 동생들이 아프면 혜선이 곁에서 돌봤었고, 툭하면 자살소동을 일으키고 앓아눕는 언니를 간호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자신이 이렇게 병구완을 받아 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혜선은 눈을 감은 채 불쑥 중얼거렸다.
“잠들고 싶지 않아.”
“왜? 어디 불편해?”
“아니. 이렇게 누군가가 간호해주는 건 처음이라서 잠들기가 아까워.”
혜선이 눈을 감은 채 대꾸하자 유현이 낮게 웃었다.
“자고 싶지 않으면 억지로 자지는 마.”
---본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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