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사무실로 옮겨 왔을 때 마샤는 노먼에게 약간 관심이 있었다. 당시 그녀가 느낀 것은 애정보다는 훨씬 밋밋한 감정이었지만, 그래도 잠깐이나마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그를 미행한 적도 있었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뒤따라가면서 그녀는 낙엽이 쌓인 길을 골라 걷고 횡단보도에서 멈추지 않는 차에 대고 성이 나서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무심코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어느새 대영박물관에 있었고, 넓은 돌계단을 올라 유리 진열장에 든 다양한 그림과 형상으로 가득 찬 방들을 지나 마침내 미라가 된 동물과 작은 악어가 진열돼 있는 이집트 전시관에 다다랐다. 거기서 노먼은 한 무리의 학생들과 섞였고, 마샤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때 그녀가 새삼스레 자신의 존재를 그에게 알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여기 자주 와요?” 하고 말을 거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노먼은 누구에게도 대영박물관에 갔던 일을 얘기하지 않았다. 설령 얘기했다 해도 미라로 만든 악어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샤는 장바구니를 주방으로 가지고 가서 내용물을 꺼냈다. 그녀는 매주 식료품 수납장에 넣을 통조림을 몇 개씩 사 왔고, 지금은 그것들을 정리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 일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통조림을 크기뿐 아니라 식품 종류에 따라 고기류, 생선류, 과일류, 채소류, 수프류, 기타로 나눠 정리해야 했다. 마지막 범주, 즉 기타에는 분류할 수 없는 품목, 예를 들면 토마토 퓌레, 포도나무 잎으로 싼 요리(이것은 충동 구매한 상품이었다), 타피오카 푸딩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런저런 통조림을 분류하는 것은 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으나 마샤는 이 일을 즐겼다.
이제야말로 레티는 진짜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여태까지 살아온 과정의 모든 사건, 특히 자신이 이 지경에 몰리게 된 원인이라 할 사건이 눈앞에 펼쳐졌다. 1914년 잉글랜드 서부에 있는 몰번의 중산층 영국인 가정에 태어난 영국 여성인 그녀가 지금 열광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찬송가를 부르는 나이지리아인들에게 둘러싸인 런던 시내의 작은 방 안에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다니….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 이건 분명히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탓으로 생긴 일이었다. 어떤 남자도 그녀를 주일에만 경건하고 차분한 찬송가 소리가 들리고, 아무도 미친 듯이 고함치지 않는 어느 조용한 교외로 데려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사랑이 결혼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믿었던 탓일까? 이제 와서 지난 40년 삶을 되돌아보니 그렇게 확신할 수 없었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며 허비한 그 모든 시간!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집 안은 어느새 조용해졌고, 그 잠시 잠잠한 틈을 타서 그녀는 용기를 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소심하다고 느끼며 올라턴드 씨네 문을 두드렸다.
그는 도로 건너편에 선 채 정신이 아뜩할 정도로 매료돼 그 집을 응시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대영박물관에서 미라로 만든 동물들을 응시하던 때와 너무도 비슷했다. 커튼이 반쯤 드리워져 있고 날씨가 꽤 따뜻한 저녁인데도 창문이 모두 꼭꼭 닫힌 그 집은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 같았다. 정원은 완전히 방치된 듯했지만, 그 안에 있는 고목이 된 나무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 나무에서 길게 내려온 가지 하나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낡은 헛간 위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우유병을 한 아름 안고 그 헛간에서 나오는 마샤를 봤다. 머리카락은 완전히 새하얗게 세었고 커다란 분홍색 꽃무늬가 있는 낡은 면 원피스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기묘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그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본 것 같은 느낌이 언뜻 들었고, 그 순간 노먼과 마샤는 서로 빤히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역시 미라로 만든 동물이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두 사람은 상대를 알아본 기색도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봤을 때 마샤는 어느새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레티는 그들의 사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요컨대 사랑은 그녀가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스터리였다. 젊은 시절에는 그녀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뭔가 부족한 삶에 익숙해져야 했고 이제는 사랑을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마조리가 아직도 사랑할 나이를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고 조금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마조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여러 번 지나쳤던 넓은 잔디밭이 딸린 커다란 붉은 벽돌집 홈허스트를 머리에 떠올렸다. 물론 그곳에 입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번은 홈허스트를 지나다가 우연히 나무 울타리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한 노파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봤던 그 노파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아직도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얼마 후면 은퇴하겠지만, 그녀는 은퇴하면 당분간은 지금의 단칸방에서 계속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런던 시내에서도 박물관, 미술관, 연주회, 극장들을 찾아다니며 얼마든지 아주 유쾌한 나날을 보낼 수 있으리라. 런던을 떠나 시골에 사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늘 그리워하고 못 잊는다는 이런 문화생활을 마음껏 누릴 참이었다.
에드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없이 티백을 흔들자 호박색 액체 한 줄기가 잔 안의 뜨거운 물에 퍼져 나갔다. 그는 늘 그러듯이 얇게 저민 레몬 한 조각을 집어넣고 다시 티스푼으로 저으며 마실 준비를 했다. ‘마샤와 나’라는 노먼의 표현을 들으니 그 두 사람이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노먼과 마샤의 결혼이라니….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오래전, 둘 다 훨씬 더 젊었을 때 만났더라면? 그러나 더 젊은 시절의 두 사람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사실과 별개로 젊었을 때 두 사람이 서로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심지어 지금도 ‘매력’이라는 말은 노먼이나 마샤와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대체 무엇이 남자와 여자, 심지어 몹시 안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을 묶어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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