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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사이렌이 울릴 때

정오의 사이렌이 울릴 때

: 이상 「날개」 이어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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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0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72쪽 | 220g | 124*188*12mm
ISBN13 9788932035888
ISBN10 893203588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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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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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느니라. 설마 아내가 아스피린 대신에 아달린의 정량을 나에게 먹여왔을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는 없다. 아내는 대체 그럴 까닭이 없을 것이니. 그러면 나는 날밤을 새우면서 도적질을 계집질을 하였나? 정말이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가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 p.51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 p.52

그리고 나는 보았다.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오의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는 순간, 이제껏 금붕어 주위를 어슬렁거리기만 하던 그 비쩍 마른 사내가 갑자기, 흡사 무슨 지시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옥상 난간으로 훌쩍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그는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선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양팔을 반쯤 펼쳤는데, 그 모습은 큰 닭이 날개를 펴고 두 발을 곧추세울 때의 모습을 연상시켰으나 비상하려는 닭의 자태와는 달리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해 보였다. 하기야 비상하려는 닭이 뜻대로 안전하고 완전하게 비상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기가 그와 같았다고 해서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 p.60~61

짧은 북쪽 기행을 마치고 나는 정원 언니와 함께 무사히 경성으로 돌아와 데파트 걸이 되어 영화에 출연할지도 모르지만, 또 다른 미래의 나는 평양으로 가 사라질 것이다.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아름다운 옷감들이 유난을 떨고 있는 또 다른 도시, 평양의 거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영. 이름을 바꾸고. 꾿빠이. 한 번만 더. 꾿빠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나는 여기에 없을 것이다.
--- p.91

그런데요, 그 사람이 언젠가부터 외출을 하고 돌아와서는 내게 그 돈을 돌려주기 시작하잖아요. 자꾸 돈을…… 그게 어떤 돈인데…… 내가 그걸 왜 그 인간에게 쥐여줬는데…… 자꾸 그걸 내게 도로 떠넘기려 하잖아요. 나를요, 자꾸 부끄럽게 만들려고…… 그러잖아요. 그게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들더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요 경부 나리,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럼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건 또 뭐였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부끄럽게 만들었던 걸까요. 그게 뭐였길래, 자기 자신까지 버려야 했던 걸까요. 그런 생각을 오래 하다 보면요…… 아무래도 정말 그게 나 때문인 것 같다는 거예요. 그것 외에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 p.104

미란이 연락을 끊고 사라지면 사라졌기 때문에, 나타나면 나타났기 때문에 그녀의 불행을 함께 져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이 수영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그 책임감은 미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영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수영은 그 일 때문에 더 조심조심 살았고 성실하게 일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아니라는 듯, 그날 나는 나쁜 일을 당한 적이 없다는 듯 성실하게 살았다. 나쁜 일을 당한 건 미란이고, 저렇게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이 그런 나쁜 일을 당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듯이 속으로 혼자 외치면서, 나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쁜 일을 당한 친구를 보호해야 한다면서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다.
--- p.118~119

그런데 자꾸 뭔 지식인 타령이야. 세상 편하다. 골방에서 뒹굴며 화장품 냄새만 맡아도 지식인 소릴 듣고. 차라리 지금도 식민지 시대라면 좋겠다. 최소한 핑곗거리는 있잖아. ‘아아, 시대가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탓에 난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틀어박혀 지내겠소.’ 하긴 요즘 그렇게 지내는 사람들 많네. 지식인 대신 히키코모리나 달관 세대라고 불리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도 식민지 시대나 다름없지. 흙수저로 태어나면 평생 시간과 노력을 수탈당하며 금수저들 배나 불리고 살아야 하잖아.
--- p.130

서울이 여전히 경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라고 말하는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무엇을 보며 서울을 걸을까 동시에 서울에서 무엇을 보는 걸까 등 뒤에서 훔쳐보려고 하지만 이제는 헤어져버린 사람들. 신세계 백화점 앞을 지날 때마다 이상한 겹겹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다고 흐르다 멈추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는 서울이 여전히 경성이라고 생각하는 쪽은 아닌데 여기가 생각과는 다르다고는 생각해. 생각과는 다르니 착각을 하지 말고 지나는 사람들을 잘 살펴봅시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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