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이었다. 역사적인 폭염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될 그해 여름은 아직 다가오기 전이었다. 호수의 수면으로 물고기들이 배를 드러낸 채 떠오르고, 축사의 가축들이 점액질처럼 바닥에 달라붙어 마지막 숨을 헐떡이게 될 그 여름, 노인들이 더위를 못 이기고 여기저기서 숨을 놓게 될 그해 여름, 뉴스에서는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보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봄이었고, 폭염이 몰려올 기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늦추위가 몰아닥쳤던 3월의 생일에 미라는 장갑과 목도리까지 하고 꽁꽁 언 벚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다. 엄마의 애인이 찍은 그 사진을 미라는 보지 못했다. 그 사진을 떠올리면 하얀 입김만 떠오를 뿐이다. 하나 둘 셋 할 때마다 그의 입가에서 안개처럼 번져나가던. 그래서 흐릿해져가던 그의 얼굴이. --- p.11~12
미라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거였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의 이야기, 엄마가 돌아가신 후의 이야기, 아니 어쩌면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의 이야기까지. 그러니까 그녀의 인생 전체에 대해. 미라의 나이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였다. 소녀적인 감성을 운운하기에는 많은 나이였지만 평탄하지 못했던 성장 과정이 그녀의 성격을 왜곡시켜버린 부분이 있었다. 멈춰버린 성장과 가속페달을 밟아버린 성장이 동시에 존재했다. 여전히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더러운 담요를 돌돌 말고서야 잠이 든다거나, 그렇게 잠든 꿈속에서 괴물에 쫓긴다거나. 그러나 잠에서 깨었을 때는 구겨진 담요를 발로 밀어 치우고 차가운 얼굴로 양치를 했다. 꿈속 괴물보다 언제나 더 무서운 건 출근 시간이었고 하루하루 변하지 않는 삶에 대한 염증이었다. --- p.27~28
그런데…… 네가 온 거야. 네가 봄비처럼 왔어. 네가 내 온몸을 적시고, 네가 내 온 마음을 적셨어. 행복해지고 싶어진 거야. 너랑 같이, 너랑 평생 행복해지고 싶어져버린 거야. 이해할 수 있겠니. 내가 왜 이런 말을 지금 여기서 해야 하는지……. 아니, 안 할 수가 없는 건지……. 죽어 지옥에 가더라도, 언젠가는 정말 천벌을 받더라도, 지금은 너와 함께하고 싶어진 거야.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거야.
그래, 그 자식을 묻었어. 어떻게 할 수 있었겠니.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야. 그 자식을 묻는 거밖에는 달리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는 거야. 묻든가, 더 깊이 묻든가…… 더 깊이 묻든가, 그것보다 더 깊이 묻든가……. 그것보다 더 깊이 묻든가, 아주아주 깊이 묻든가…….--- p.59~60
혜성이 지나간다고 했던 밤, 혜성이 우주를 가로질러 지구의 하늘을 지나갈 거라고 했던 밤, 그날 그토록 아름다웠다던 초록빛 긴 광선은 어디에 있었을까. 섬광은 또 어디에 있었을까.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고 아름답게 지나가기만 했다는데, 그토록 뜨거웠던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그때 어떤 우주에 있었던 것일까. 만일 또 다른 그녀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우주가 있다면, 그 평행우주에서 고양이는 살아 있을까, 죽어 있을까. --- p.112~113
아저씨는 그렇게 물으시면 안 돼요. 아저씨는 아시잖아요. 사랑이라는 걸…….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꽃을 심을 수 있었겠어요. 그 꽃을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피어나게 할 수 있었겠어요. 아저씨는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거잖아요. 우리 엄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아저씨 사랑만 사랑이고 내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시면 안 된다는 거지요. --- p.165~166
미친놈. 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불꽃놀이의 그 밤, 프러포즈를 받을 줄 알았던 그 밤, 누군가 민혁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그 찬란하고 황홀한 순간에조차 받아야 할 만큼 민혁에게는 중요한 전화 같았었다. 전화를 받고 돌아온 민혁의 표정이 창백했었다. 민혁은 그 전화가 김주희에게서 온 거였다고 나중에 말했다. 정명주는 자기가 했다고 했다. 그런데 최윤재는 이제 그 전화를 자기가 건 거라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다들 미친것들이었다. --- p.190~191
아저씨. 그날 만일 주사위가 다르게 던져져서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아저씨를 걱정시키지 않는 딸로 자라날 수 있었을까요? 그러면 민혁이라는 남자를 만나지 않게 되었을까요? 그런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아무 의미도 없는 상상이잖아요. 게다가 그러면 우리 수온이가 태어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다시 산다고 해도 나는 우리 수온이를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을 거니까요. 그러려면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다시 민혁이라는 남자를 사랑해야 하잖아요. 또 미친 듯이, 또 온 마음으로,
내 운명을 다 바쳐서 사랑해야 하는 거잖아요. 사랑이란 건, 그런 거잖아요. --- p.197
이튿날, 자기 집에서조차 쫓겨 나와야 했던 날의 아침에도 벚꽃이 마당에서 난분분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훅 불어와 머리와 어깨에 벚꽃이 가득 내려앉았다. 열일곱 살 상처를 입은 여자아이는 벚꽃을 잔뜩 뒤집어쓰고도 아름답지 않았다. 이장의 말마따나 미친년 같아 보였을 뿐이다. 사실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여름이었으므로 벚꽃 같은 건 없었을 테니. 미친년 같아 보이든 아니든 미라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을 테니.
--- p.244~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