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 삼가 조의.”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도 어제였을 것이다. (……) 난 사장한테 이틀간의 휴가를 신청했고, 사장은 그런 사유로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 내킨 표정은 아니었다. 난 사장에게 “제 잘못이 아닌데요”라고까지 했다. 사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내가 사과해야 할 건 없었다.---p. 9
저녁때,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내겐 이나저나 마찬가지라고 했고, 그녀가 원하면 우린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난 전에도 이미 한 번 말했듯이,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아마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마리는 “그러면 왜 나와 결혼하는데?”라고 했다. 난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그녀가 원하면 우리는 결혼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하기야 결혼을 원하는 건 그녀였고, 난 그저 좋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pp. 49~50
태양의 열기가 온통 나를 짓누르며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걸 막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의 거대한 숨결이 얼굴에서 느껴질 때마다, 난 바지 주머니 속의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태양을 이기고자, 그리고 태양이 내게 쏟아붓는 아른한 취기를 물리치고자,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모래나 유리 조각이나 새하얘진 조개껍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칼날이 나를 찔러댈 때마다, 난 이를 악물었다. 난 오랫동안 걸었다.---p. 65
난 내 이마 위에서 태양의 심벌즈가 울리는 것밖에 느끼지 못했고, 어렴풋이나마, 여전히 내 눈앞에 있는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양날 검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 불타는 검이 속눈썹을 쏠아내며 고통스러운 내 두 눈을 후벼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모든 게 흔들렸다. 바다가 깊고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하늘 전체가 온통 열려서 불비(火雨)를 퍼붓는 것 같았다.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했고, 난 권총을 꽉 쥐었다. 노리쇠가 당겨졌고, 난 손잡이의 매끈한 볼록 부분을 어루만졌다. 바로 그때,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게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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