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독일 뮌스터에서 수학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강사와 출판사 주간을 지냈으며, 현재는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옮긴 책으로『한낮의 여자』『렘브란트 마지막 그림의 비밀』『요헨의 선택』『운명』『사랑받지 않을 용기』『이성의 섬』『미술의 순간』『아인슈타인의 그림자』등이 있다.
카사노바는 젊었을 때 무라노 섬의 수녀원 정원에서 보낸 밤을 다시 떠올렸다. 어쩌면 다른 정원, 다른 밤이었는지도 몰랐다. 어느 날 밤이었는지 그는 더이상 알지 못했다. 아마도 수많은 밤이 그의 기억 속에서 합쳐져 단 하나의 밤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수많은 여자들도 기억 속에서 단 한 명의 여자가 되어, 수수께끼 같은 형상으로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결국 그런 하룻밤은 다른 밤과 같지 않았던가? 그리고 한 여자는 다른 여자와 같지 않았던가? 특히 끝났을 때는?‘끝났다’라는 단어가 그의 관자놀이에서 계속 쿵쿵 울렸다. 이제부터는 이 단어가 그가 잃어버린 존재의 맥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 p.70, 「카사노바의 귀향」 중에서
“당신, 정신 나갔군요. 나는 당신과 함께 떠날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다른 어떤 남자와도 떠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내 목숨도 잃게 할 거예요.”프리돌린은 꼭 술에 취한 것 같았다. 그녀, 향기가 나는 그녀의 몸, 빨갛게 타오르는 그녀의 입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방의 분위기, 이곳에서 그를 감싸고 욕정을 자극하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는 이 밤의 모든 체험에 도취된 동시에 갈증을 느꼈다. 그는 그 체험들 중 어떤 것의 끝도 보지 못했다. 또 자기 자신에도, 자신의 대담함에도, 자기의 내면에 느껴지는 변화에도 도취되었고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머리를 휘감은 베일을 끌어내릴 것처럼 매만졌다.
「카사노바의 귀향」 작품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성 편력을 자랑하고 모험을 펼치던 신화적 주인공 카사노바가 다가오는 노년에 대한 불안과 떠나온 고향 베네치아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카사노바는 만토바 근교에서 우연히 만난 옛 친구 올리보의 집을 방문하는데, 그곳에 머물던 올리보의 조카딸 마르콜리나에게서 자신과 대립되는 젊음을 보고 더이상 성적 매력이 없는 자신을 확인한다. 자의식이 강하고 지적인 마르콜리나는 카사노바의 저명한 이름에도, 그의 매혹적이고 탐욕스러운 눈길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카사노바는 마르콜리나의 사랑을 얻고자 젊고 매력적인 남자 로렌치로 변장하고 마르콜리나와 성적 합일을 이루는 사기극을 벌이게 되는데……
「꿈의 노벨레」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 부부는 지난여름 휴가 때 덴마크에서 각자 겪은 심리적 일탈의 체험을 고백한다. 덴마크 장교에게 성적으로 끌린 아내 알베르티네는 결혼과 가정과 미래를 포기하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보이는 반면, 산책 도중 알몸의 소녀에게 매혹당한 남편 프리돌린은 무력감을 느끼고 머뭇거린다. 아내는 용기 없는 남편의 태도를 비난하고, 이에 상처를 입은 남편은 자신의 남성성을 시험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에게 꿈같은 현실이 전개된다. 환자의 딸에게 받은 사랑 고백, 대학생들과의 시비, 창녀의 유혹 등의 단계를 거친 뒤, 그는 마지막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가장무도회에 몰래 발을 들여놓게 된다. 반시민적인 세계이자 성적 일탈의 상징인 가장무도회에서 프리돌린은 회원이 아닌 사실이 들통 나 목숨의 위협을 받지만 생면부지의 여자가 그를 대신해 희생한다. 반면 아내 알베르티네는 꿈속에서 남성성을 보여주지 못한 프리돌린을 겁쟁이라고 조롱하고 그를 죽게 내버려두며 자신은 에로스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