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사를 연구하는 이유
상업이란 생산된 물자를 상인이 개입하여 소비자에게 상품으로 판매하고 이윤을 취득하는 생업 유형을 가리킨다. 그러나 유통이란 상인의 개재(介:) 여부와는 상관없이 생산자와 소비자 혹은, 생산자 상호 간에 물자가 직거래되는 행위까지도 포함하므로 상업에 비해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선사시대의 증여와 호혜적 교역, 고대사회에서 흔히 관찰되는 조세의 재분배에 바탕을 둔 재정적 물류 등은 기본적으로 상인이 개입하지 않는 유통형태이다. 또한 전근대사회의 물자유통에는 토지, 노동력, 재배방식, 가공기술 등 생산에 수반되는 각종 조건뿐만 아니라 생산된 물자에 대한 보관과 수송, 당대의 보편적 기호, 소비재로서의 유용성과 물가, 정치권력의 시장관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경제활동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생산에서 최종 소비에 이르는 유통의 전 과정에 내포된 다양한 인간관계로까지 연구영역을 심화,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은 시각에서 보면 상인의 상업활동만으로 영역을 국한시킨 기존 상업사로서는 물자 순환의 전 과정을 통시대적으로 다루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근년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유통사 또는 유통경제사라는 분류 개념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이는 중개자로서 상인이 개재되지 않는 경우까지를 포괄해서 유통경제의 통시대적인 변화과정을 살피고 유통기구의 변천을 구조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생산력,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한 기존 진보사관의 패러다임을 보완하려는 학문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유통사를 연구하게 되었다.
내재적, 관계론적 관점의 중시
각각의 시대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서 분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크고 작은 단절을 경험하면서도 이전 시대의 필연적 소산으로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일례로써 우리가 잘 아는 명치유신 후 일본의 자본주의화와 제국주의화 과정을 서구로부터의 충격, 국제정세의 추이라는 외재적 관점만으로 접근하려는 자세는 온당치 못하다. 어떠한 외인도 그 사회 고유의 복잡다기한 내인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관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서와 같이 유통의 역사를 고찰하는 경우도 일차적으로는 전근대 일본사회의 내부로부터 형성된 다양한 경제적 스펙트럼을 검증하는 내재적 관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유통사는 자기폐쇄적인 틀 안에 갇혔던 종전의 일본사를 개방적인 교류의 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아주 적절한 학문분야라 할 수 있다. 집단의 안과 밖을 연결 짓는 것이 유통의 본질이며, 나아가서 내셔널리즘을 초월하여 국가라는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는 연결망사회의 복합체로서 세계를 파악하려는 관점이야말로 유통사에서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유통경제와 정치권력
유통사의 전면적인 검토를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양자의 연결고리로써 물류와 교통, 화폐, 상인 및 시장과 도시, 금융, 물가와 소비자의식 등등 유통과정에 관련된 모든 분야를 종합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전근대사의 경우, 유통사의 수많은 대상 영역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실은 경제 외적 범주에 속하는 정치권력과의 상관관계이다. 특히 고대국가 이후의 일본 전근대사회는 시대를 거슬러 오를수록 조세 상품화에 기반을 둔 정치권력의 재정적 물류가 유통경제를 주도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므로 상인의 주요 활동무대인 시장적 물류는 당대 권력체계의 성격, 재정 및 유통정책과 긴밀히 연동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질에 있어 대립적이면서도 현실에서는 상하종속적인 협조체계를 영위하는 재정적 물류와 시장적 물류의 관계는 전근대 유통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한 논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근현대 자본주의의 경우 이윤의 무한증식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 시장, 자본의 끝없는 탐욕을 적절한 선에서 통제하여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도모할 수 있는 국정운영의 기본 정신은 정치 지도자에게 필수 불가결한 덕목이다. 하지만 극히 다양한 여러 동인이 복잡하게 뒤얽힌 시장경제 및 금융을 정치가 완벽히 통제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 시장경제가 미성숙한 전근대사회의 경우는 일견하여 정치권력이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유지, 보전하기 위해 유통경제를 비교적 수월히 장악하고 통제한 것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다.
실제로 패전 후 일본 역사학계를 주도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전근대 일본사에서 정치체제와 유통경제 발전이 상극을 이루었으며, 권력은 체제 안정을 위해 유통경제를 강력히 통제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중농주의를 기조로 하며 아직 전문적인 경제관료가 육성되지 않았거나 막 태동했을 뿐인 단계에서 끊임없이 확대되는 시장적 물류에 대해 실제로 정치권력이 그 전모를 파악하고 통제와 조정을 가하는 데는 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근대 일본사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서도 정치권력은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유통정책의 실질적인 측면을 통제 대상인 상업자본의 시장지배력에 의존해야만 했다.
위와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이 책은 유통경제와 정치권력의 상관관계를 다룬다. 이 책의 제명을 ‘전근대 일본유통사와 정치권력’으로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