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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선 교회는 두 개의 문을 만들었는가?

왜 조선 교회는 두 개의 문을 만들었는가?

: 예배당으로 본 한국 교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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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0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450g | 152*215*20mm
ISBN13 9788998480066
ISBN10 899848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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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문화재
1980년대 유럽에서 처음으로 문화유산 관광이 대두할 무렵에는 문화재를 새로운 노다지로 여기고 애지중지 보존하고자 했다. 문화재는 절대 훼손해서는 안 될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었다. 문화유산 관광이 전 세계로 확산된 요즘에는 문화재를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preservationist’s argument)보다는 더 많이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 즉 보존과 활용을 동시에 추구하는 보호론(the conservation paradigm)이 더 큰 힘을 얻고 있다. 따라서 도시 재활성화나 재생은 문화재 또는 문화유산의 재활용으로 귀결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문화재청에서는 2018년 지역 문화재 활용 사업으로 ‘생생 문화재’ 132선, ‘향교·서원 문화재’ 95선, ‘문화재야행’ 27선, ‘전통산사문화재’ 34선 등 총 290선을 선정했다. 지역에 있는 문화재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개발하여 지역 문화 향유 기회를 늘리고, 지역 경제 활성화와 고용 창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사업이다. 생생문화재 활용 사업은 2008년부터,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 사업은 2014년부터, 문화재야행은 2016년부터, 전통산사 활용 사업은 2017년부터 시작했다.

네 가지 사업 중에서 제일 먼저 시행한 생생문화재 사업은 잠자고 있는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관광 자원화하여 문화재가 역사교육의 장이자 대표적인 관광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기획한 사업이다. 말 그대로 ‘문화재 문턱을 낮추고 프로그램 품격을 높여서 온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자 한 문화유산 관광이다. 290가지나 되는 지역 문화재 활용 사업 중에서 유독 한 가지 사업이 눈에 뜨인다. 바꿔서 말하면, 기독교 문화재 사업은 290선 사업 중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 한편으로 아쉽고 다른 한편으로 너무나 소중한 기독교 문화재는 등록문화재 제291호 구 군위성결교회 예배당이다.

군위성결교회 문화재예배당은 정문을 두 개로 만들었다. 오른쪽 정문은 여자가, 왼쪽 정문은 남자가 사용했다. 정동제일감리교회 예배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배재학당 학생들은 왼쪽 출입문을 사용했다. 오른쪽에 있는 이화학당 학생들은 오른쪽 출입문을 사용했다. 양림장로교회 오웬기념각, 정동제일감리교회 예배당, 군위성결교회 문화재예배당 등 장로교회·감리교 회·성결교회 3대 교단 모두 남녀 출입문을 달리했다. 강한 유교 윤리에 사로잡혀 남녀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살았던 조선 사람들을 배려한 건축이다.

군위성결교회 문화재예배당
군위성결교회는 예수교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헤스롭 선교사가 풍금을 팔아서 드린 헌금으로 1920년 10월 15일 창립한 교회다. 1937년 두 번째 예배당인 문화재예배당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담임목사 이종익이 순직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10월 제9대 담임 교역자로 최헌이 부임하고, 그해 12월 17일 헌당한다.

최헌 목사와 성도들이 동방요배를 거부하면서 교회는 두 번째 시련을 겪는다. 1941년 10월 일제는 동네 청년들을 교회당에 모을 터이니 시국 강연을 하라고 요청했다. 최헌 목사는 거절하고 투옥된다. 1941년 12월 최헌 목사는 부흥회에서 「금수강산가」, 「슬프다 고려반도」, 「근화동산가」, 「우승가」 등을 찬양하고 또다시 체포된다. 일제가 독립사상을 담고 있는 노래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모진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보안법 위반으로 1년 2개월 11일 동안 옥고를 치른다. 1943년 2월 25일 석방된다. 그러나 1943년 5월 24일 전국 성결교회 교역자 체포령으로 200여 명의 성결교회 교역자들과 함께 다시 옥에 갇힌다. 1943년 12월 29일 일제가 성결교회를 강제 해산하면서 성결교회 교역자들을 기소 중지했다. 그러나 최헌 목사는 계속 옥고를 치른다. 군위성결교회는 일제로부터 제일 먼저 폐쇄되었고, 담임목사 최헌은 일제에 의해 가장 오랫동안 옥에 갇혔다.

고통스럽지만 자랑스러운 신앙은 광복을 맞으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역사를 쓴다. 제10대 담임 천세광 목사는 양정중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한다. 1926년 순종 인산일(국장) 6.10만세운동에 참가하고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다. 1940년 삼천포교회 담임목사로 재임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또다시 7개월 동안 옥에 갇힌다. 1943년 일제가 성결교회 목회자를 모두 구속할 때 세 번째 옥에 갇힌다. 12월 성결교단을 해산하면서 다른 목회자를 석방할 때에도 천세광 목사는 최헌 목사와 마찬가지로 계속 옥고를 치른다. 1944년 2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가 1945년 8월 11일 사상 예비검속 때 마지막으로 갇힌다. 감옥에서 광복을 맞은 천세광 목사는 고향 군위로 달려간다. 흩어진 성도들을 일일이 찾아 심방하고 9월 5일 해방 기념 예배를 드린다. 군위군 치안 유지위원장으로 광복 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한 독립유공자다. 평생 38개 교회를 개척하고 76,000명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 대장으로 살다가 1964년 소천했다.

일제가 교회를 폐쇄하면서 군 농회에 2,310원을 받고 팔아버린 문화재예배당을 20만 원에 되찾은 것은 1956년이다. 전쟁의 상흔마저 간직한 예배당은 지난 2006년 문화재예배당이 된다. 군위성결교회는 생생문화재 사업을 통해 기독교 문화재 해설사를 양성하여 골목길 성지순례를 활성화하고자 한다. 새천년에도 자랑스러운 교회 역사를 계속 이어간다.

정동제일감리교회 벧엘예배당
1882년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1883년 5월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가 정동에 미국 공사관을 개설한다. 고종은 답례로 민영익을 전권대로 한 보빙사 일행을 미국에 파견한다. 1883년 7월 제물포를 출발하여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보빙사 일행은 대륙 횡단 열차에 오른다. 워싱턴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미국 감리교선교회The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임원 존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를 만난다.

가우처 목사는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를 통해 조선 선교 전망이 밝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선 선교 헌금 5,000달러를 드린다. 1884년 미국북감리교회는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목사와 의료 선교사 스크랜튼 박사 그리고 교육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을 조선 선교사로 임명한다. 1885년 조선에 들어온 이들은 병원·학교·교회 등을 차례로 설립한다. 스크랜튼 부인은 1886년 5월 31일 한 학생을 데리고 이화학당을 시작하고, 아펜젤러는 1886년 6월 8일 두 학생으로 배재학당을 시작한다. 스크랜튼 박사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서 일하다가 1886년 6월 15일 시병원施病院을 설립한다.

1887년 아펜젤러는 스크랜튼 부인 명의로 되어 있는 달성 사택 뒷문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에 있는 작은 초가집을 산다. 벧엘예배당Bethel Chapel이라 이름 짓는다. 한양에 세운 첫 하나님의 집이다. 달성 사택은 정동과 진고개 중간쯤, 현재 한국은행 후문 근처 상동이다. 여기에서 10월 6일 첫 예배를 드린다. 11월 근처에 있는 더 큰 집을 사서 예배당을 옮긴다. 큰 방 중간을 기준으로 병풍을 쳐서 남녀를 좌우로 나누고 예배를 드린다. 그해 성탄절 첫 조선어 설교를 한다. 이렇게 한양 첫 개신교 교회, 정동제일감리교회를 시작한다.

그러나 고종은 1888년 4월 28일 돌연 포교금지령을 내린다. 천주교회는 종현에 명동성당 예배당을 지으려 한다. 십자가 모양 명동성당은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서 경복궁을 향해 있다. 장소와 위치를 바꾸라는 고종의 권고를 무시하고 건축을 강행하자 고종이 포교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게다가 영아소동baby riot까지 벌어진다. ‘선교사들이 어린애들을 잡아다가 배재학당 지하실에 가두어두고 잡아먹기도 하고, 눈알을 뽑아서 약에 쓰거나 렌즈를 만든다’는 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벧엘예배당을 처분한다.

한동안 관망하다가 의주와 평양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선교를 재개한다. 1888년 10월 1일에는 아펜젤러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다. 1889년 12월 7일 정동계삭회를 시작한다. 정식 교회로 출범했지만 예배는 남녀 각각 따로 드린다. 강한 유교 윤리에 사로잡혀 있는 조선 관료들에게 시빗거리를 만들 어주지 않기 위해서다. 정해진 장소는 없었다. 여자는 주로 이화학당이나 스크랜튼 부인 집에서, 남자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을 거쳐 배재학당에서 주로 예배를 드린다. 이를 통합하여 단일 교회로 합친 것은 1897년 12월 26일 성탄 주일에 동대문 볼 드윈예배당과 함께 벧엘예배당을 헌당하면서부터다. 명실공히 정동제일감리교회로 우뚝 선다.

[대한그리스도인회보]는 다음과 같이 벧엘예배당 헌당 소식을 전한다. “2년 반에 걸쳐 지은 아름다운 예배당의 길이는 77척이요, 넓이는 40척, 높이는 25척이다. 그리고 종탑의 높이는 50척이다. 회당 안에 좌우로 좁은 방이 하나씩 있는데 그 길이는 28척, 넓이가 14척이다. 지붕은 함석으로 덮이고 사면에 유리창을 단 명랑한 건물이다. 총 공사비는 8,048.20엔이고, 그중 조선 교인들이 연보한 돈이 693.03원이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사이 언덕에 정동제일감리교회 벧엘예배당이 있다. 왼쪽 언덕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왼쪽 문으로 드나들고, 오른쪽 언덕에서 이화학당 학생들이 오른쪽 문으로 드나들었다. 예배당 중앙에 장막을 쳐서 남녀가 서로 볼 수 없게 했다. 주일이면 청춘 남녀가 중앙에 있는 교회를 향해 몰려드니 연애당이라 불렀단다. 정작 당사자들은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다. 남녀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예배 공간을 통합한 것은 1910년대 이후다.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일부 무너지고, 1980년대 화재로 일부 소실되기도 했다. 크고 작은 증축이 있었지만 원래 건축물에 심한 훼손은 없는 채로 오늘에 이른다.

양림장로교회 오웬기념각
광주 양림동 양림오거리에서 양림장로교회 십자가가 높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 멋진 벽돌 건물이 나온다. 네모반듯한 건물인데 유난히 문이 많다. 정방형건물 모서리를 중심으로 좌우를 나눠 남녀 출입문을 달리한 ‘오웬기념각’이다. 숭일학교 남학생들은 왼쪽 출입문, 수피아학교 여학생들은 오른쪽 출입문을 사용했다.

오웬기념각은 선교사들이 대장Captain이라 불렀던 토목기술자 스와인하트M. L. Swineheart가 지은 건물이다. 결원 아치창과 주석기둥 그리고 네덜란드식으로 쌓은 벽돌 등 지금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독특한 서양풍 건물이다. 당시 광주는 물론 인근 고을에서도 구경꾼들이 모여들 정도로 엄청난 건물이었다. 1918년 최흥종 목사의 동생인 의사 최영종과 결혼한 김필례는 1920년 오웬기념각에서 ‘김필례음악회’를 개최한다. 광주에서 처음 열린 음악회다. 1921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교포음악단이 오웬기념각에서 공연을 한다. 남녀가 쌍을 이뤄 사교춤과 탭댄스를 추는 공연이었다. 남녀 출입문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 휘장을 쳐서 남녀가 서로 볼 수도 없었던 시절이다. 서양 문화와 유교 문화가 충돌한다.

목사이자 의사였던 오웬은 1898년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한다. 1899년 목포 양동에 오웬진료소를 열고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한다. 1900년 정동 언더우드 목사 사택에서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파이팅Gerogiana Whitting, 1869-1952과 결혼한다. 1904년 3월 광주에 들러 답사하고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2월 15일 임시사택을 완성한다. 성탄절 이브에 유진 벨과 함께 양림동에 도착한다. 성탄절 아침 11시 유진 벨 목사 사택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광주선교부를 시작한다. 광주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든다. 서양 선교사의 집을 구경하러 인산인해를 이룬 것이다. 선교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1909년 3월 28일 일요일 아침 장흥 전도 여행 중 앓아눕는다.

이튿날 조선 신자들은 오웬 선교사를 가마에 태워서 산 세 개를 넘어 60리 떨어진 장흥읍에 도착한다. 다음 날 아침 가마꾼을 구해 뛰다시피 해서 130리를 더 간다. 새 가마꾼을 사서 밤새 70리를 또 달린다. 수요일 새벽 2시에 양림동에 도착한다.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으나 토요일 아침 급격하게 악화된다. 의료 선 교사 윌슨 의사는 급히 목포선교부에 있는 포사이드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포사이드는 다 죽어가는 한센 환자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양림동 언덕에 도착한다. 그러나 오웬은 “나에게 조금만 휴식을 주었으면”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난다.

오웬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 William Owen 밑에서 자란다. 오웬은 할아버지의 기념 병원을 짓고자 했으나 성경을 가르칠 건물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농한기인 겨울에 일주일 또는 한 달씩 성경학교를 열었다. 200리나 300리 떨어진 곳에서 북문 안 양림리교회를 찾아온 조선 신자들은 성경공부가 끝난 뒤 교회 처마 밑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서 교회에 다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웬은 무척 안타까웠다. 오웬이 떠난 뒤 미국에서 건축 기금 4,000달러를 모금하여 조선에 보낸다. 1914년 드디어 오웬기념각을 완공한다. 좌우 출입문 위 현판에 “In Memory of William L. and Clement G. Owen(윌리엄 오웬과 클레멘트 오웬을 기념하며)”이라 쓴다.
--- 서론 '100년 교회 100년 예배당'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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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성결교회 문화재예배당은 빛을 잃은 민족에게 찬양과 만세의 요람이었습니다. 문화재예배당의 ‘두 개의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 될 것입니다.”
- 허병국 (군위성결교회 담임목사)
“현존하는 유일한 19세기 양식 교회당인 벧엘예배당은 한국 교회 첫 문화재로 한국 교회사와 근대사를 품고 있습니다. 이곳의 ‘두 개의 문’은 정동제일감리교회가 걸어가는 또 다른 100년 동안 한국 교회와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 송기성 (정동제일감리교회 담임목사)
“100년을 가로지르며 남도 선교를 증언하는 오웬기념각은 양림장로교회의 역사이고 광주 근대화의 요람입니다. 오웬기념각 ‘두 개의 문’은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성찰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 백영기 (양림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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