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자. 내가 어린이였다는 것을 오늘도 기억하자.’ 어쩌면 내가 기억해 내기만 한다면 다시 어린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의 감각으로 충만했던 완성된 존재, 어린이. 모든 게 새로움이었던 어린 시절엔 작은 빗방울 하나도 ‘큰 사건’이었다. 그렇게 큰 사건들에 하나하나 감탄하다 보면 내 하루는 가득하게 찼다.
--- 「저는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겠습니다」중에서
버스에 올라타면 어린이는 승객이 ‘된다’. 빵집에 들어가면 어린이는 빵 고르는 사람이 ‘된다’. 미용실에 가면 어린이는 머리카락 잘리는 사람이 ‘된다’. 놀이터에 가면 미끄럼틀 타는 사람이 ‘되고’, 동물원에 가면 기린과 인사 나누는 사람이 ‘된다’.
그들은 매 순간 주체다. 어린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체적 인간이 아니라는 말은 어른들의 헛소리다. 의사가 되고 싶고, 배우가 되고 싶고, CEO가 되고 싶은데 아직 그것들이 안 된 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인간으로서 충만한 하루를 보낸다.
---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승객이 됩니다」중에서
하루는 나의 구원이다. 살아간다는 게 꽉 막힌 관 속에 누워 누군가에게 발견되길 기도하며 버티는 일처럼 느껴지던 때, 그때 찾아낸 아니, 내게 운명처럼 와준 구원이 ‘하루’였다. 하루는 나를 죽지 않게 했고 앞으로도 죽지 않게 해 줄 영원의 열쇠다.
하루씩만 살기.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삶의 방식인지 내가 느낀 대로 설명해낼 수 있을까. 설명되지 못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삶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을 살지도 말고, 한 달을 살지도 말고, 한 해를 살지도 말고, 20대를 살지도 말고, 노년을 살지도 말고 오직 하루만 사는 것.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다. “내일은 없다. 오늘만 산다”라는 말은 내가 사는 나라의 칙령이고 삶이라는 마법 세계의 주술문이다.
--- 「오늘 돌릴 팽이를 내일로 미루지 않겠습니다」중에서
실수는 행복이 그렇듯 제각각이어서, 어떤 사람에게 실수라고 여겨지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실수가 아니기도 하다. 아이에겐 방바닥에 쏟은 물도 실수의 흔적이 아니다. 어른들은 바닥에 물을 쏟았을 때 “앗! 실수!”라고 말하며 당황해 하지만, 물을 쏟은 게 잘못한 일일까 생각해 보면 막상 그렇지도 않다. 듣는 사람 없으면 욕 한 번 하고 나서 닦아 버릴 일이라면, 그건 잘못한 것도 아니니까. 우리는 물을 쏟지 않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니까.
--- 「오늘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자랑 좀 하겠습니다」중에서
그것이 사실이라서 믿는 게 아니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산타든 괴물이든 무언가를 백 퍼센트 믿는 아이들처럼 믿음의 순도가 더 높아질 때 맘이 더 편안해지고 현재를 가볍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믿는 거다. 산타 안 믿고 똑똑해지거나 산타 믿고 행복해지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난 그냥 산타 믿고 오늘 하루 설레고 싶다. 맘 편히 행복해지고 싶다.
--- 「산타 믿고 그냥 행복하겠습니다」중에서
어린아이처럼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춘다는 건 무언가를 ‘움켜쥐는’ 일이다. 머리로 짜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감정이나 영감을 거칠게 낚아채, 순간에 꽉 움켜쥐는 행위다. 그런 작품들에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 「내가 당신을 울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중에서
예전엔 나의 한 평생이 참 긴 것처럼 여겨졌다. 이제 막 생의 출발선을 떠나온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은 내 인생이 꽤나 내달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오래달리기인 줄 알고 뛰었는데 100미터 달리기였단 걸 알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란! 우리네 인생이 90세까지라 하더라도, 그것이 의외로 길지 않은 시간이란 생각이 들 때면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 「세상의 숫자를 없애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중에서
난 내가 카스텔라인 줄 알았다. 옆구리를 먹든 머리를 먹든 한결같이 균일한 맛의 카스텔라.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여러 겹으로 된 크레이프 케이크였다. 층마다 색깔도 다르고 맛도 다른. 겹겹이 누운 그 층들이 하나의 케이크를 만들었고, 모든 층이 나였다. 그러니 가장 바깥으로 보이는 자아만 나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이 ‘공식적인’ 나라고 여길 필요가 애초에 없었던 거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준비해 둔 ‘사회적인 자아’뿐 아니라 혼자 있을 때 슬며시 드러나는 ‘심층적인 자아’도 나로 인정하는 일. 지금부터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인 듯하다. 촌스럽게 크레이프 케이크를 한 겹 한 겹 먹지 말고, 이제라도 대범한 수직적 포크질을 해야 할 때다.
--- 「저는 여러 겹으로 만들어진 크레이프 케이크입니다」중에서
어쩐지 이 사회는 초심을 강요하는 듯하다. 아이가 뽀로로 인형을 갖고 놀다가 내팽개치고 피카츄 인형에 뽀뽀를 퍼부어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지만, 어른이 그러면 수군수군댄다. 줏대가 없다느니 무게가 없다느니. 이런 게 무서워서 나는 몇 분 전의 내 감정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습관에서 아직도 벗어나질 못했다.
--- 「내 엉덩이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말든 울다가 웃겠습니다」중에서
‘돈 안 되는 일’을 하나쯤 하는 것. 이것이 휴머니즘을 회복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순수한 마음을 전할 때 오히려 돈은 방해꾼이다. 좋은 의도만으로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내게 돈을 주면 이 일을 안 하겠다”라고 엄포를 놓고서 해야 한다. 사례를 받으면 돕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가 손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용돈은 감사합니다만 종이접기에 쓰겠습니다」중에서
아이들이 예쁜 이유는 걱정을 마음에 오래 담아 두지 않아서다. 꽁하고 담아 놓는가 싶다가도 만화가 시작되면 걱정 따위 다 휘발해 버리고 없다. ‘어린이 사주팔자 50% 할인’ 같은 광고를 본 적 없는 이유, 어린이의 사주를 점치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이미 이상한 걱정을 하느라 운명을 잘못 운전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걱정도 팔자라면, 그때그때 털어 버리는 단순한 자의 사주엔 복이 있나니!
--- 「걱정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모두 줘 버렸습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