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나는 여행이 끝나면 내 인생에도 노란 화살표가 군데군데 그려질 줄 알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정해진 방향으로 힘차게 걸어가는 삶이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여행이 끝난 후 아무리 기다려도 인생의 화살표는 나타나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려 봐도 노란 답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길 잃은 여행자처럼,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처럼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이다.
긴 여행을 마친 여행자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화려한 여행 사진만 남긴 채 모두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여행이 끝나도 아물지 않는 이 상처들을, 다들 무얼 하며 견디고 있는 걸까? 사실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나만 이리 괴롭게 견디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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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불안할 때면 떠올리는 도시가 있다. 북유럽의 잘사는 나라, 모두가 이민 가고 싶어하는 선망의 나라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다. 외장하드에 쌓인 폴더들 중 헬싱키를 클릭하고, 부적을 보듯 도시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헬싱키는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단순하고, 때때로 무료하다. 욕심내는 법을 모르고, 함부로 선을 넘는 일도 없다. 다정하고 단정한 어른의 얼굴, 언제나 답을 알고 있는 슬램덩크의 안선생님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오늘은 헬싱키 안성생님의 미소로도 떨칠 수 없는 극도의 불안이 감지된다. 결국 길 잃은 애처럼 울먹이며 K를 불러냈다. 바쁜 사람을 불러내 망한 책 이야기와 여행 후유증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긴 싫었지만, 지금 그 애를 만나지 않으면 심리 상담사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할 심각한 상태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심각한 여행 우울증에 놓인 지금, K로부터 익숙한 농담과 여행의 추억을 꼭 처방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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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의 한 술집에서 만난 이름 없는 친구와 밤새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어떤 것은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모든 젊음은 반드시 한 번은 멸망한 자아 위에서 시작된다고. 그러니 우리의 젊음이 지금 멸망하고 있다고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고, 내내 얻어터지더라도 끈질기게 버티며 길 위를 서성여보자고. 서둘러 돌아간 그 애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깊은 밤처럼 고요한 빈자리에 마침표 대신 쉼표를 별처럼 꾹- 찍어주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는 그 애를 위해. 아니, 캄캄한 밤을 버티며 흔들리는 우리 모두를 위해.
--- p.121
문득 오늘 오후에 보았던 풍경들이 머리 속에 재생되었다. U2의 노래가 배경 음악으로 흐르고, ‘아무리 황홀한 노래도 결국은 끝이 나고, 가장 멋진 장면의 영화도 언젠가는 엔딩을 맞고야 만다’는 자막이 붙었다. 내가 조슈아트리 아래서 찾으려고 했던 건 아마 이 여행의 끝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지금 길 위를 헤매고 있는 건, 비로소 완전히 여행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 곡의 노래도, 한 권의 책도, 한 편의 영화도 모두 끝이 있기 마련이니까. 문득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길었던 여행이 서서히 저물어 감을 느낀다.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델마를 불렀다.
“델마. 길었던 여행이 이제야 끝나나 봐.”
--- p.139
“Keep Portland Weird”
포틀랜드, 확실히 이상한 사람들의 도시다. 사랑스럽고 이상한 사람들의 도시.
매일 비만 내리는 흐린 날씨에, 유명한 랜드마크도 없지만, 그럼에도 포틀랜드가 좋은 건 이상한 사람들 덕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파타고니아의 리사이클 원단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골목 끝 슈퍼마켓에선 주변 농장에서 유기농으로 수확한 싱싱한 먹거리들을 원하는 만큼만 살 수 있다고, 더 좋은 건 불필요한 포장이 없는 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고 서점에서 저녁을 보내고, 쉬는 날이면 친구들과 캠핑을 떠나 소박한 식탁을 차리는 킨포크 라이프의 사람들. 소규모 양조장에서 나온 수백 가지 종류의 맥주를 마시며 실험 정신 강한 로컬 아티스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가 숙소에서 만난 포틀랜드의 친구들 역시 사랑스럽지만 어딘가 이상한 녀석들이었다.
--- p.172
갈 길이 먼 지루한 드라마 속에 광고 같은 여행도 몇 번 넣어주고, 예상치 못한 새로운 사건도 만들어 보는 거다. 시청률 2%,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 드라마인데 주인공이 가만히 말 잘 들으면 무슨 재미인가. 남들이 다 말리는 사표든, 제 인생 까먹는 여행이든, 돈 못 버는 시시한 짓거리든, 무엇이든 낯선 이야기를 넣어보는 거다. 맞지 않으려고 가드를 잔뜩 올린 주인공보다, 군데군데 멍든 얼굴로 키득거리며 세상을 향해 어퍼컷을 휘두르는 주인공이 더 흥미진진하지 않을까? 그런 주인공이라면 남은 드라마가 조금은 기대되지 않을까? 적어도 앞으로 내게 남은 55부의 시간은 그랬으면 좋겠다.
--- p.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