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환 이후의 홍콩이라는, 보지 못하고 놓친 연속 드라마 중에서 이전 줄거리를 알지 못하고 ‘우산혁명’이라는 클라이맥스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 이처럼 복잡하고 기괴하며 변화무쌍한 홍콩에 만고불역(萬古不易)의 원리는 존재할까? …… 한 가지 답은 ‘자유’였다. …… 홍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자유’의 본질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 p.23-24, 「서론」중에서
…… 홍콩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홍콩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이다. ‘홍콩국(香港國)’이 아니고 중국 광둥성이나 푸젠성(福建省) 등과 같은 ‘홍콩성(香港省)’도 아니며, 베이징시(北京市)나 상하이시(上海市)와 같은 ‘홍콩시(香港市)’도 아니다. 중국의 특별행정구란, 홍콩 외에는 마카오만 ‘특별’한 지구이며, 그래서 비교 대상을 정하기도 어렵다. --- p.30, 「제1장 ‘일국양제’하의 홍콩」중에서
홍콩 정부는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의 원칙 아래에서 대륙의 관리는 임관(任官)하지 않는다. 또한 홍콩에는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1949년 5월에 제정된 ‘사단조례(社團條例)’는 홍콩 역외의 정치적 조직과 관계를 지닌 단체를 사실상 금지했다. 이 규정은 공산당과 국민당을 동시에 비합법화하는 것이며, 냉전 시기의 홍콩이 중립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는데, 현재도 공산당은 홍콩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다. --- p.39, 「제1장 ‘일국양제’하의 홍콩」중에서
‘일국양제’란 ‘현상유지’와 ‘50년간 불변’을 그 기둥으로 삼고 있는 정책이며, 반환 이전의 홍콩을 기한이 설정되기는 했지만 온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홍콩의 정치와 사회의 구조는 식민지 시대에 영국이 구축한 골격 위에 성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 그렇지만 영국에 의한 통치는 그 구조를 보는 한에서 ‘자유’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식민지 통치 시스템이었으며, 종주국이 강권을 휘두르는 독제체제였다. --- p.56, 「제2장 영국의 유산: 식민지 구조와 자유」중에서
선거의 도입, 프로 정치가와 정당의 등장은 사회로부터 유리된 정권이 권력을 독점해왔던 홍콩 정치 시스템의 근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미완으로 끝났다고 해도 홍콩 사회에 그 자유를 지키고 정치에 저항하기 위한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민주화는 또한 영국 통치의 중요한 유산 중 하나였다. --- p.88, 「제2장 영국의 유산: 식민지 구조와 자유」중에서
홍콩의 ‘자유’는 대륙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중국 정부는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연이은 붕괴를 지켜보며 서방 국가들에 의한 사회주의 중국의 전복을 두려워했다. 중국은 민주화 운동을 ‘화평연변(和平演變, 평화 속의 정권 전복의 음모)’이라고 부르며 경계했다. ‘톈안먼 사건’ 때의 상황으로부터 베이징은 홍콩이 영국에 의한 ‘전복 기지’로서 이용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중국 정부는 베이징이 홍콩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에 홍콩도 대륙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장쩌민 국가주석은 톈안먼 사건 이후인 1989년 7월 11일 홍콩 기본법 자문위원회·기초위원회 대표 등에 대해서 “우물 속의 물은 강의 물을 범하지 말라”라는 비유를 들며 대륙과 홍콩이 상호 간에 간섭을 피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 p.96-97, 「제3장 ‘중국화’와 홍콩의 자유: 반환 이후의 홍콩」중에서
기본법에는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하지만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점이 있었다. 그것은 행정장관 후보자를 지명하는 ‘지명위원회’이다. 기본법에는 “광범위한 대표성이 있는” 지명위원회가 “민주적인 절차”로 후보자를 지명한다고 되어 있는데, 위원회의 구성이나 후보자 지명 방법에 대해서는 일절 적혀 있지 않다. 전국인대 상무위원회는 2007년의 결정에서 지명위원회의 구성은 현행 행정장관 선거위원회의 구성을 참조할 수 있다고 천명하고 있다. 선거위원회에는 각계의 대표자가 균형 있게 참가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대표성”이 있다고 베이징은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베이징과 정치적으로 가까운 재계 인사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명위원회가 불투명한 형태로 후보자를 압축하고, 보통 선거가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 p.108-109, 「제3장 ‘중국화’와 홍콩의 자유: 반환 이후의 홍콩」중에서
식민지 시대의 홍콩에는 다양한 정치적 제약이 있었지만, 많은 홍콩인은 ‘자신들이 자유롭지 않다’고 인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국’에 ‘귀환’하면서 식민지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주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홍콩인들은 중국 반환 이후 ‘자유롭지 않다’라고 느끼게 되고, 결국 ‘우산운동’(제5장 참조)이 촉발되기에 이르기까지 사태는 악화되었다. --- p.134, 「제4장 식민지 홍콩에서 자유의 조건: 문화와 사회」중에서
홍콩인들에게 ‘반환’은 ‘싫든 좋든 중국에 회수된다’라고 하는 감각에 가깝다. 왕훙즈는 묻는다. 이미 반환은 정치와 법률로 결정된 ‘기정 사항’이기 때문에 왜 굳이 ‘역사를 쓸’ 필요가 있는가? 쓸데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한 홍콩인에 대해서 영국 식민지 지배의 사실을 어떻게 ‘중화민족과 주권’의 이야기와 틀로 자리매김할 것인가가 베이징에게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중국 일변도의 이야기로는 역시 홍콩의 역사와 심성을 묘사할 수 없다. 홍콩은 중국적이지도 않고 영국적이지도 않은데, 중국다움도 영국다움도 있다. --- p.143, 「제4장 식민지 홍콩에서 자유의 조건: 문화와 사회」중에서
이에 반해서 몽콕의 ‘투쟁 민주주의’는 ‘토의 민주주의’나 ‘중국화’와는 별도의, 완전히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가 아닐까? 여기에서 말하는 ‘투쟁 민주주의’는 엘리트 정치에 대항하는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열광하는 대중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포퓰리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기피해왔던 형태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예절이 바른 훌륭한 시민들에 의한 논의만으로는 실현이 어렵다. 때로는 군중이라고 할 수 있는 관객의 주목을 모으고 공동체의 일체감과 가치관에 호소할 필요도 있다. 몽콕에서 군중은 누구나 연설하며 전단을 붙이고 구경을 하고 비상시에는 외부로터의 공격에 대해서 함께 저항하는 장소를 만들었다. 관객도 스스로 참가하여 고양과 자극을 이끌어낼 수 있는, 투쟁 민주주의인 것이다. --- p.209-210, 「제5장 우산혁명: 일어선 관객들」중에서
지금 홍콩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자기 결정의 자유’라고 여겨진다. 생존하는 자유, 돈 버는 자유, 문화의 자유는 그 어느 것이나 강한 권력의 비호 아래 제공되었던 자유다. 그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반환으로 사회와 경제, 사상 면에서 중국이 간섭하는 영향력을 확대하자 홍콩의 젊은이들은 ‘부모’인 것처럼 연기하는 중국에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우산운동의 지도자와 학생들이 연설과 의견 발표 등에 사용했던 무대 배경에는 ‘명운자주(命運自主)’라는 네 글자가 붓글씨로 크게 써 있었다. ‘명운자주’는 문자 그대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직접 결정하는 자유를 나타낸다. --- p.225-226, 「맺음말: 홍콩의 자유, 아시아의 자유」중에서
홍콩에서는 앞으로도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력과 대기업의 재력을 이용하여 ‘돈 버는 자유’와, 권력에 농락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기 결정의 자유’는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립과 논쟁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자유’를 둘러싸고 세계에서 가장 농밀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는 곳이 홍콩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곳으로부터 세계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자유’의 형태가 언젠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홍콩은 항상 변화한다. 그리고 홍콩의 자유도 계속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 p.227, 「맺음말: 홍콩의 자유, 아시아의 자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