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지난 1980년대 후반, 맑스의 철학, 또는 맑스주의 철학이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칼 맑스의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은 그의 어느 문건보다도 많이 번역되고, 또한 많이 소개되었다. 아마 그 최초의 번역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1987년 출간된 양재혁의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과 그 부록으로 실린 엥겔스의 수정본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일 것이다.
그 이유, 즉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이 많이 언급되고 논의되는 이유는 우선 이 경구형식으로 쓰인 11개 테제들의 극히 적은 분량 때문일 것이고, 그 다음 11개 테제들이 포함하고 있는 맑스의 철학사상의 핵심을 정형화하고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물론 말할 필요 없이 맑스의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은 맑스의 철학사상 전체를 일정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전반기 철학사상을 완결된 형태로 집약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엥겔스가 그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머리말(Vorbemerkung)’의 맨 끝에 언급하고 있는 그대로일 것이다.
포이어바하의 교설 자체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서는 빠졌다. 현재의 목적으로는 불필요하겠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나는 맑스의 옛 노트에서 여기 부록으로 인쇄하여 덧붙인 포이어바하에 관한 11개 테제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나중에 정리하기 위하여 급박하게 써 놓은 메모여서 전혀 인쇄를 고려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씨앗(der geniale Keim der neuen Weltanschauung)이 깃들어 있는 최초의 문건으로 더없이 귀중한 것이다.
엥겔스가 이렇게 특별한 관심으로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을 정리하여 출간하게 된 이유는 맑스의 철학사상에 있어 이 테제들이 갖는 중요성은 물론 맑스의 철학사상 전체를 일정하게 요약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했을 것이고, 그것을 엥겔스는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씨앗이 깃들어 있는 최초의 문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맑스의 철학사상이 그 씨앗의 형태로 일정하게 요약되어 있는 최초의 문건이 곧 그의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맑스의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을 이해할 때 곧잘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씨앗’이란 엥겔스의 말을 토대로 출발하곤 한다.
0.2.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의 중심 내용의 하나가 포이어바하철학에 대한 비판이란 것은 상대적으로 포이어바하의 철학사적 위치를 확인시켜준다. 이 테제들 속에는 얼마간 관념론 철학, 특히 헤겔철학에 대한 비판도 깃들어 있지만, 포이어바하에 이르기까지의 종래 유물론에 대한 비판과 포이어바하의 유물론에 대한 비판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룬다. 물론 이와 같은 비판을 통해 맑스는 그 자신의 철학사상을 제시하고자 하며, 따라서 각각의 테제들 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그 진정한 의미가 비판과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11개 테제들의 전반적인 구성 체제와 그 형식을 살펴보면 각각의 테제들은 독립적 정형으로 완결된 듯이 보이지만, 또 몇 개의 테제들은 서로 연결된 의미로 묶여져 이해되면서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완결된 구성 체계를 이루고 있기도 한다. 즉, 제1테제와 제2테제, 그리고 제3테제는 포이어바하철학에만 국한된 테제들이 아니고 종래의 관념론 및 유물론 일반에 대한 비판과 그 비판으로부터 맑스 자신의 새로운 유물론과 그 철학사상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에 대해 제4테제, 제5테제, 제6테제, 그리고 제7테제는 포이어바하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비판 형태를 띠면서 앞선 제1테제와 제2테제, 그리고 제3테제에 대한 내재적 연관을 갖는 형식을 취한다. 제8테제와 제9테제, 그리고 제10테제는 새로운 유물론, 즉 맑스 자신의 유물론 철학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면서 그것이 주로는 ‘사회형식(Gesellschaftsform)’, 또는 ‘사회형태’와의 연관된 규정으로 표현된다. 마지막 제11테제는 언뜻 앞선 테제들과는 완전히 독립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의 10개 테제들을 총괄하여 철학사상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책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철학자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며, 좀 더 일반적으로는 학문에 종사하는 지식인들에게 지식인으로서의 ‘지식인의 책무’를 제시한 테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맑스의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의 전체적인 구성 체계는 4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겠으며, 그것은 곧 맑스철학 자체의 포괄적인 구성 체계이기도 하다.
첫째, 제1테제부터 제3테제까지는 종래의 관념론과 유물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맑스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토대를 제시한다.
둘째, 제4테제부터 제7테제까지는 포이어바하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이해를 통해 새로운 변증법적 유물론의 내재적 비판 근거를 제시한다.
셋째, 제8테제부터 제10테제까지는 역사적 유물론으로서의 사회형식에 대한 관점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넷째, 제11테제는 철학, 곧 보편적 학문으로서의 그 세계관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정형화하여 제시한다.
물론 전체 11개의 테제들은 엥겔스가 그렇게 불렀던 것처럼 모두 순수하게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이라고 하기에는 그 표제가 표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좀 더 포괄적인 보편성과 전체성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다. 맑스 자신이 포이어바하의 철학과 관련하여 썼던 테제들인 이상 각각의 테제들이 얼마간 포이어바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일 테지만, 그러나 이미 포이어바하를 넘어서 철학과 학문 전반에 대한 유물론적 세계관에 대한 규정을 내포하고 있으며, 특히 제11테제는 맑스 이전의 철학사상과 맑스 자신의 철학을 구별 짓는 차이점을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때문에 맑스의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을 엥겔스는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씨앗’이라고 하는 표현의 결정적 준거로 삼았을 것이다.
0.3.
맑스의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을 이와 같은 네 부류의 범주적 구성 체계로 구별하는 것은 물론 맑스와 엥겔스가 각각의 테제들에 붙인 일련번호의 순서에 따르는 구별이기는 하지만, 각각의 테제들 상호간의 내재적 연관성들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 전체적 의미와 체계에 있어 선차적 보편성을 갖는 구별이란 것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테제들 상호간의 순서에 따르는 체제 및 그 내재적 연관성과는 달리 그들의 독자성에 관련된 개별 테제들의 의미는 맑스철학 전체의 맥락에서 재검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그것은 또 다른 준거를 바탕으로 하여 구별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이해 방식을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엥겔스가 말한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씨앗’이란 의미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과 맑스의 철학사상 자체의 핵심에 접근해가는 하나의 통로라는 점에서 주제 자체의 범위도 훨씬 광범위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제1테제로부터 제11테제에 이르는 그 순서에 따르는 일련의 해석과 이해 방식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네 부류의 범주로 구분하여 묶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평이한 접근의 통로가 되는 것이겠다.
물론 여기에서 다루게 되는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은 맑스가 쓴 원래의 수고본을 대상으로 하여 이해하고 해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엥겔스의 수정본을 참고로 하여 비교하게 될 것이며, 가능한 한 맑스 자신의 수고본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엥겔스가 왜 그렇게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이유도 아울러 고려하게 될 것이다. 맑스가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을 쓴 것이 1845년 초이니까 그로부터 약 45년이 지난 1888년을 전후하여 엥겔스가 그에 대해 약간의 문장을 수정하게 된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내용적으로도 그럴만한 시차에 따른 역사성도 함께 적용되었을 것이다. 특히 ‘사회형식’, 또는 ‘사회형태’에 대한 이해는 그러한 엥겔스의 견해가 반영되었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구명한다는 것은 또 다른 과제일 것이다.
0.4.
이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이 갖는 맑스철학 내에서의 위치는 비록 그것이 메모나 경구 형식의 짧은 글이기는 하지만 엥겔스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맑스 자신의 철학사상을 정리하는 데 있어 더없이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맑스의 철학이 그 이전의 모든 철학, 즉 관념론 철학은 물론 유물론 철학과의 경계선이 그어진 채 이 테제들 속에 확연히 구별되어 있으며, 맑스의 철학이 종래의 철학과 무엇이 다른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문건으로서 이 테제들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와 같은 맑스의 작업은 주로 헤겔의 철학과 포이어바하철학에 대한 이해와 비판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리하여 그 결론으로 철학자들이, 또는 지식인들이 세계와 현실에 대한 해석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 실천적 변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1848년의 혁명에 대한 예비적인 문건이면서도 곧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공포하기 이전의 철학사상적인 문건으로서 뿐만 아니라 맑스 자신의 철학사상적 세계관을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요약하고 있는 문건이기도 할 것이다.
--- 「들어가는 말」중에
1. 제1테제
칼 맑스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
1. 포이어바하에 관하여
1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하의 유물론까지 포함하여)의 주요 결함은 대상, 즉 현실성 및 감성이 단지 객체의, 또는 직관의 형식 아래서만 파악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성적인 인간의 활동으로는, 곧 실천으로는 파악하지 못한 것인바, 이를테면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활동적인 측면이 유물론과는 반대로 관념론에 의해 -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를 알지 못한 관념론에 의해 - 추상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른다. 포이어바하는 감성적인 객체들을 - 즉, 사유의 객체들과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객체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활동 그 자체를 대상적인 활동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진정한 인간적인 태도로 간주하며, 다른 한편 실천은 단지 그것의 더러운 유대인적인 현상 형식 속에서만 파악되고 고착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적인” 활동의 의미, 곧 “실천적?비판적” 활동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포착하지 못하고 만다.
칼 맑스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들〕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하의 유물론까지 포함하여)의 주요 결함은 대상과 현실, 그리고 감성을 단지 객체의 형식 아래서만, 또는 직관의 형식 아래서만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성적인 활동으로는, 즉 실천으로는 파악하지 못한 것인바, 이를테면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활동적인 측면이 유물론과는 반대로 관념론에 의해 전개되었던 것이며, 그러나 그것은 단지 추상적으로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고 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인바, 왜냐하면 관념론은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하는 감성적인 객체들을, 즉 사유의 객체들과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객체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활동 그 자체를 대상적인 활동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진정한 인간적인 태도로 간주하며, 다른 한편 실천은 단지 그것의 더러운 유대인적인 현상 형식 속에서만 파악되고 고착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적인” 활동의 의미, 곧 “실천적?비판적” 활동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포착하지 못하고 만다.
1.1.
제1테제에 의하면 맑스 이전의 모든 유물론의 주요 결함은 ‘대상, 즉 현실성 및 감성’을 ‘단지 객체의, 또는 직관의 형식 아래서만 파악’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감성적인 인간의 활동으로는, 곧 실천으로는’ 파악하지 않고 있으며,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제1테제의 첫 문장이다. 이는 맑스철학이 그 이전의 유물론과 구별되는 근본적인 차이가 ‘감성적인 인간의 활동’, 또는 ‘인간의 감성적인 활동’으로서 실천 개념에 있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맑스에 의하면 대상으로서의 현실, 또는 감성은 단순히 소여(所與)되어 있는 것(das Gegebene)으로서의 객체는 아니다. 대상, 즉 현실이 인식 대상으로 소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감성적인 인간의 활동의 산물, 곧 실천의 산물이란 것을 맑스 이전의 유물론은 간과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상, 즉 현실은 인식 대상으로서 객체로만 파악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주체의 활동인 실천의 산물로서 소여된다고 하는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인 연관적 인식 대상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맑스의 변증법적 인식론은 실천론과 유리되지 않는다. 인식 대상이 실천을 매개로 한 주체와 객체의, 또는 주관과 객관의 변증법적 통일로서 소여되어 있고, 따라서 소여는 인식 대상에 대한 주체의 수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떠한 대상도 자연적 즉자태, 또는 즉자적 존재(Ansichsein)로 인식되어지게끔 주어져있는 인식론적 단초의 사실이 확인될 수 없다. 그것은 철학은 물론 자연과학에 있어서조차도 마찬가지이다.
--- 「I.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적 토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