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행복에 로그인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을 지양하고, 인문지능을 지향해야 한다. 인문지능은 스몰데이터를 탐색하면서 인간과 미래에 대한 인문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스몰데이터는 데이터의 총량이 아니라 데이터에 포함되지 못한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내용을 중시한다. --- p.6
사투르누스는 다가올 미래의 실제 모습을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사투르누스의 예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미래의 불안을 사전에 능동적으로 예감할 필요가 있다. 즉, 사투르누스의 예언은 행운을 점찍기보다는 불운의 향방을 미리 알려 준다. 사투르누스의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폐허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 p.16
사투르누스는 시차를 존중한다. 서로의 시간 차이를 동일하게 여기지 않고, 각자의 시침과 분침이 자율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차이는 우리 삶을 행복으로 이끈다. 미래를 위해 모두가 같은 시간의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은 사투르누스의 눈에는 불행하게만 보였다. 우리가 사투르누스의 벌거벗은 시선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풍경은 시간의 불일치를 인정하는 태도이다. --- p.20
사람들이 현재에 불만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과거와 단절하고 미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독 과거를 성찰의 시간으로 간주하면서 살아간다. 아울러 미래를 인식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 p.35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신과 인간이 서로 예언의 유희를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기계중심주의에 따라 인간의 운명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확률과 통계의 빅데이터만이 인간의 예측력을 위한 토대가 되어 버렸다. 미래에 대한 지식은 곧 권력의 역사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래의 권력을 독점한 특정 집단만이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구조는 타당하지 않다. --- p.37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외적 조건과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다. 갑은 을을 대할 때 가면을 착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갑 앞에서 가면을 착용해야 한다. 세계는 을이 가면을 쓴 채, 갑의 요구에 순응하는 곳이다. 세계의 모든 을은 서로의 가면을 보면서 위안을 받는다. --- p.39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입사하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 유행한다.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면서 미래의 행복에 대비한다. --- p.56~57
이성과 합리만으로는 행복한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인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성과 마법이 교묘하게 성좌를 형성해야 한다. --- p.63
신화시대에는 신이 죄와 벌을 독점했다. 그래서 인간은 미래의 죄와 벌에 대해 속죄하려고 했다. 반면 근대사회에는 국가가 죄와 법을 움켜쥐었다. 국가는 신마냥 인간의 운명을 거머쥐고 있다. 이러한 논리라면, 신화시대와 근대사회에서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 p.74
인간은 운명과 성격 둘 중 하나만으로는 온전하게 살 수 없다. 운명을 모르는 개인은 오만하고, 성격을 모르는 인간은 자만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운명과 성격의 양 축을 오가며 중립적 시각을 지닐 필요가 있다. --- p.81
근래 젊은 세대는 상처에 취약하다. 자신이 설정한 삶의 목표와 목적에서 이탈하기를 주저하면서 다가올 실패를 두려워한다. 대신 자아 존중감을 중시하기 때문에, 타인이 자신을 비방하는 행위를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인간을 컴퓨터 게임의 이모티콘으로 간주한다. 타인과의 관계를 주저하면서도 인정 욕구는 강하다. --- p.91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의 꿈을 강요하는 태도는 동일성의 폭력이다. 자녀는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척한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공부한다면, 자칫 자녀의 꿈은 사라져 버릴 수 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가 각자의 꿈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p.110
내게 학생들은 아름답게 빛나는 별과 같다. 학생들이 지닌 고유성과 개성을 인정하기 위해 학기 내내 노력한다. 학기 초에 제 빛을 강렬하게 발하는 학생도 있지만, 그 빛을 숨긴 채 은은하게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도 있다. 또는 자신의 빛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학생도 있었다. 다양한 빛을 내는 학생들이 모여 한 학기 동안 수업을 진행하며 그들만의 별자리를 만들어 간다. --- p.114
인간은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할 것이다. 탈주체를 논하는 시대에, 과연 주체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부정적 특수는 긍정적 보편조차도 거부하고, 부정적 보편은 긍정적 특수로 혼동하는 괴상한 시대이다. --- p.141
베냐민의 관상학론에 따르면, 인간이 타인의 얼굴을 인식하면 삶의 구체적 결을 지각할 수 있다. 페이스북에 업로드된 얼굴 사진은 타인에게 자신의 얼굴을 전달하려는 측면도 있지만, 자기 얼굴에 함몰된 나르시시즘적 측면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얼굴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얼굴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얼굴을 직시할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 p.142
우리 시대의 대학에는 벌레들이 버글거린다. 요즘 학생들은 친구들에게 벌레 이름을 붙여 부른다. 인간을 벌레 취급하는 것도 못마땅하지만,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대학생들이 동료 학우를 버젓이 벌레 취급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태도를 더욱 이해할 수 없다.
--- p.147
중세사회에서는 신이 모든 것을 주관했다. 근대사회는 신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사회로 변모했다. 근대사회에서는 신이 자리 잡을 터가 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인간이 신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의 흉내를 내고 있다. 신의 가면을 쓴 인간은 다른 인간을 벌레 취급한다. --- p.149
이름은 개인의 존재를 명확하게 표현한다. 인간, 사물, 자연을 포함한 일체의 세상은 다양한 이름의 전시장일 수도 있다. 이름을 함부로 지어서는 곤란하다. 아울러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도 안 된다. --- p.154
요즘 부모는 자녀를 사물처럼 과다 명명하는 듯하다. 아이들은 각자 개성을 자유롭게 발휘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어릴 적 아이들은 미래의 직업을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자기 꿈이 아닌 부모의 꿈을 실현하려고 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다양한 꿈의 언어를 과다 명명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는 자기 꿈을 상실하는 것이다.
--- p.157
우리 사회는 현재의 만족을 중시한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개인의 만족만을 추구한다. 자기 계발의 사이비 마술이 요동을 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계발의 ‘자기’가 진정한 나인지를 성찰해야 한다. ‘자기’를 알지 못한 상황에서, 계발에만 몰두하는 자세는 올바르지 않다. --- p.235
어른의 경험이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 작용하는 한, 젊은이들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은 경험을 쌓다 보면 자신들도 의젓하게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과 젊은이들은 시간 격차를 두고 동일한 경험만을 반복할 뿐이다. 젊음의 가치는 무경험에 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에 호기심을 갖고 삶의 역동성을 마련하기 위해서 일보 전진하는 과정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다. --- p.245
미래를 둘러싼 모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양극에 두고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끌고 다니는 매직의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운명이 씌운 족쇄와 사슬을 풀어 줄 마법이 필요하다. 온몸을 감싼 족쇄와 사슬이 풀리는 순간, 벌거벗은 행복을 바라보아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에서 벗어나 새로운 우회로에 접어들어야 한다. --- p.258
사투르누스의 매직 아이는 삶의 불합리성을 관조하면서 일체의 주위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힘이다. 사투르누스의 매직 아이는 멜랑콜리하지만, 시간의 모순을 직시하는 과정을 거쳐 자율적인 마법의 세계를 마련한다. 아울러 마술과 미신의 막에 둘러싸여 있어도, 위선적 막의 세계를 관통할 수 있는 투시력이다. 사투르누스의 매직 아이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숨결을 내쉬는 목소리다.
--- p.259